[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우익단체]고향사람 200명 살육한 3선 국회의원

올해는 광복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한국 근현대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하고 불편하다고 합니다. 어느 한 곳 밝은 구석을 찾아보기 힘든 근현대사를 쭉 돌이켜보면 그 불편함은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인지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워대던 교과서에서도 근현대사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맙니다.

덕분에 우리가 아는 건 단순합니다. 일제 침략으로 우리 민족은 고생했고, 더러는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도 했고, 더러는 이완용처럼 친일파가 됐다는 선에서 근대사는 정리됩니다. 현대사는 미소 냉전으로 분단이 됐고,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전쟁 후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은 독재를 했고, 더러는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박정희 정권 이후 국민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풍요로운 나라를 일굼으로써 현대사는 끝이 납니다. 흡사 KTX를 타고 부산역에서 서울역까지 창가로 비치는 풍경을 보고 한국을 다 봤다는 느낌입니다.

해서 많은 것들이 잊혀졌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이완용이라는 이름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다 숨어 버렸습니다. 해방 후 부당한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된 수많은 민중에 대해서도 ‘시대가 그랬다’는 막연한 논리로 덮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 치더라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근현대사의 악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악랄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왜 그자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지’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군인, 우익단체, 친일경찰, 친일헌병, 친일깡패, 토호, 해외인사 등 각 분야에서 대표적인 악인들이 취재대상입니다. 이들을 기록으로 남겨 영원히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오늘 두 번째 살펴볼 ‘잊지 말아야 할 이름’으로는 경북 경주군 내남면에서 우익청년단체를 이끌었던 이.협.우라고 합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피로 물들인 인물입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은 여러분의 후원으로 제작되는 기사입니다. 후원금은 취재비와 자료구입비 등에 사용됩니다.


1. 민보단장 이협우


이협우는 1921년 경북 경주군(현 경주시 외곽지역, 한때 월성군) 내남면 망성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그렇게 형편이 어렵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학교까지 나오고 대구농림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일제시대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그는 출세를 위해 만주로 갔다.

당시 만주는 조선인에게 그나마 기회의 땅이었다. 만주에서 조선인은 ‘2등 국민’으로 ‘3등 국민’인 여진족·몽골족보다는 성공 가능성이 있었다. 박정희가 만주로 간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만주에서 출세하는 건 예상보다 쉽지 않았고, 1943년 이협우는 고향인 내남면으로 내려와 농업기수(면 서기)를 지냈다.

▲ 이협우 사진./자료제공 전갑생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1945년 광복이 됐다. 이협우는 어린 나이에 잠시 면 서기를 했기 때문에 친일파로 몰리지는 않았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10·1사건이 일어나면서, 일부 좌익세력들이 경주군 일대를 습격했다. 이로 인해 경찰서가 잠시 좌익세력에게 점령되기도 했고, 5채의 가옥이 전소됐으며 쌍방 5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협조조직인 우익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협우는 내남면에서 그 핵심에 서게 된다.

1947년 이협우는 내남면 대동청년단장을 맡았으며, 1948년 대동청년단은 서북청년단을 흡수해 강력한 우익단체로 거듭나게 된다. 대동청년단은 1948년 정부 수립 후 다시금 대한청년단으로 재편되면서 모든 우익청년단체를 통합한 강력한 단체로 거듭났다. 이협우는 내남면 대한청년단장이 됐다.

대동청년단 광양지부 결성식.jpg
대동청년단 광양지부 결성식 장면.

한편 경찰은 부족한 경찰력을 보조하기 위해 민보단이라는 준군사조직을 설립했다. 민보단 정원은 보통 30명으로 단원은 경찰서장이 추천하는 사람으로 구성된다. 또한 민보단에게는 총과 무기가 지급됐다. 1949년 내남면 대한청년단장 이협우는 내남면 민보단장직을 겸했다. 그의 나이 불과 28살이었다.

우익청년조직과 준군사조직을 장악한 이협우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협우는 자신의 친척 동생인 이한우와 함께 내남면 민보단과 대한청년단을 이끌었다. 이협우의 민보단에는 현직 경찰인 이홍렬도 가담하고 있었다.


2. 피로 물든 내남면


현직 경찰을 부하로 둔 내남면 민보단장 겸 대한청년단장 이협우는 1948년 3월 15일 내남면 이조리에서 ‘청년단에 비협조적이다’는 이유로 주민 정우택을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고향을 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간간이 사람을 죽여오던 이협우 일당은 1949년 3월 8일 망성리에서 유칠우와 유찬조가 남로당원이라며 총으로 쏴 죽인 후, 그날 저녁 잠자던 유 씨 일가족 6명을 불로 태워 몰살시키는 등 살육의 규모가 커졌다. 이렇게 이협우 일당은 1950년 8월까지 169명을 학살했다. 물론 이 169명은 4·19혁명 이후 구성된 유족회에 공식 신고된 숫자로, 연구자들은 실제 내남면민 200명 이상이 피살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후 이뤄진 검찰 조사에 따르면 이협우의 학살은 좌익을 소탕하기 보다는 사적인 감정으로 자행한 학살이 많다고 한다.


“내가 보증할 테니 더는 죽이지 말라”


박세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박세현은 내남면 명계리에 흘러들어온 외지인이었는데, 같은 마을 손 씨 집안의 쌀 5가마를 훔쳤다가 마을에서 탄핵을 당했다. 이후 박세현의 친동생이 민보단에 가입했고, 자신을 탄핵한 마을 이장 김원도 집안과 손 씨 집안을 빨갱이로 몰았다고 한다.

1949년 7월 31일 김정도와 김하묵이 내남면 용장리 소 시장에서 소를 팔고 오다 민보단원에게 체포돼 돈을 모두 빼앗기고 내남면 경찰지서 뒤 용장산 골짜기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그날 저녁 이 소식을 들은 김 씨 집안 식구 4명이 내남면 경찰지서에 찾아와 항의하였으나 이들도 민보단원에게 붙잡혀 용장산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다음날(1949년 8월 1일) 밤 이협우는 민보단원 10여 명을 2~3개 조로 나눠 명계리를 급습했다. 주민들에게 방에 불을 켜도록 한 뒤, 사람 그림자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이날 마을 이장 김원도 씨를 비롯한 일가 16명이 죽고, 손 씨 일가 8명이 죽었다. 박세현 한 개인의 원한으로 30명이 죽은 셈이다.

며칠 뒤 이협우는 민보단원을 이끌고 남은 김 씨 일족을 멸족시키려 명계리로 향했으나, 명계리에서 민보단을 이끌던 정규준이 “이 집은 내가 보증하고 모든 책임을 지겠으니 더는 죽이지 말라”고 부탁해 이협우를 돌려세웠다.

이협우는 덕천2리 주 씨 집안의 딸을 탐냈으나 거절당했다. 이협우는 1950년 1월 5일 밤 주 씨 일가족을 습격해 8명을 죽이고 시신을 짚단으로 소각한 후 주 씨 집안의 가산을 강탈해 친척 동생인 이한우의 집으로 옮겼다.

1949년 8월 25일 망성리에서 권 씨 일가 6명을 ‘청년단에 비협조적이다’는 이유로 죽인 후 1년 뒤인 1950년 8월 11일에는 다시 망성리로 들어가 권 씨 일가 친척 45명을 학살했다. 보통 학살을 할 때는 ‘이들은 좌익의 동조자, 좌익의 가족이다’라고 억지 명분을 뒤집어 씌운다. 그러나 이협우는 그런 억지 명분조차 없이 ‘청년단에 비협조적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했으며, 1949년 7월 9일 망성리에서 양임순(48)·최귀순(23) 씨, 1949년 8월 4일 용장리에서 정영택 씨 일가족 3명은 아직까지도 왜 죽였는지 알 수 없다.

이협우 학살을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 온 가족을 몰살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훗날 보복을 우려한 행동으로, 어린아이도 철저히 죽였다. 검찰 조사에 의하면 10세 미만 어린이 35명이 피살당했으며, 아이를 안고 있는 모자를 동시에 쏴 죽이기도 했다. 1949년 12월 25일 성탄절 노곡리에서 살해당한 최상화와 최동식은 불과 8살, 4살이었다. 이협우는 그들이 빨갱이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죽였다. 아무리 사람을 죽여도 '빨갱이를 죽였다'고 하면 넘어가던 시대였다.

15b9ea5c72716e7aee5eacf28c2c0d00.jpg
▲ 1950년 대구형무소 재소자 학살 현장 모습./사진 출처: 금정굴인권평화재단(gjpeace.or.kr)

물론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협우는 재산이 많은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재산을 강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풍운아 채현국>(도서출판 피플파워)의 주인공인 경남 양산 효암학원 채현국 이사장에 따르면 양산 개운중학교를 건립하고 초대교장을 지낸 임상수 씨도 이협우에게 빨갱이로 몰려 재산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이창해라는 독립중대 중위가 나타나 임상수 씨를 구해 주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임상수 씨는 전 재산을 털어 학교(개운중학교)를 지었다. 빼앗을 재산이 없으면 빨갱이로 몰리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3. 벙어리 국회의원


이협우가 얼마나 기세등등했던지 “경주군은 이협우 왕국이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고 한다. 이협우는 어린 시절 이루지 못했던 출세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다. 이협우는 대한청년단 후보로 경주군 갑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다. 무려 16명의 후보가 난립한 이 선거에서 이협우는 16.60%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그의 나이 29살이었다. 그러나 한 달도 지나지 않은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국회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이 시기에도 이협우는 민보단을 이끌고 1950년 7월 22일 노곡리에서 최현호 씨를 비롯해 일가친척 22명을 학살했고, 1950년 8월 11일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망성리에서 권 씨 일가 45명을 학살했다. 앞서 1화의 주인공 김종원이 국회의원에게 총질을 했다면, 이협우는 현직 국회의원 신분으로 지역구 주민을 학살한 셈이다.

부산피란국회.jpg
부산 피난 국회 모습.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다. 이협우는 재선 국회의원에 도전했다. 이번에는 만만찮은 경쟁자가 있었다. 서영출이란 자도 있었다. 친일경찰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를 고문할 때 손과 발을 모두 묶어 천장에 매달아 놓는 속칭 ‘비행기 고문’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경주군 대동청년단장과 경주경찰서장을 지냈다. 그는 또한 초대 국회의원 선거인 5·10선거에서 경주지역 독립운동가 출신인 최순 선생의 당선을 막기 위해 청년단원을 동원해 사살한 사람이었다.

이협우는 서영출을 1000여 표 차이로 누르고 재선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자유당에 입당하게 된다.


“전 국민이 기억해야 할 이름”


재선 국회의원이 됐지만, 이협우의 존재감은 전혀 없다시피했다. 국회 단상에 올라 발언을 한 경우가 전혀 없었을 뿐더러 1956년 8월 20일 자 경향신문 기자석(기자칼럼)에 의하면 안쓰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평소에는 어디에 있는 지 존재도 알 수 없는 벙어리 국회의원 이협우라는 사람. 그러나 여야가 무슨 일을 가지고 싸울 때면 반드시 한두 마디씩 기성을 지름으로써 사람들의 혀를 차게 하는...(중략) 자유당에서 장면 부통령의 발언을 트집 잡아 논란을 일으키자 이 사람은 의석에 앉아서 출석출석 몸을 들추더니 별안간 ‘처리해버려! 처리해버려’. 물론 2대 국회 때부터 벙어리인 이협우 의원인지라 단상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심정(?)은 짐작할 수 있으나 기껏 배웠다는 소리가 겨우 ‘처리’ 두 자!”

그렇게 국회에서 겨우 한 마디 했건만, 그는 야당 신예인 김영삼 의원에게 바로 역공을 당하고 만다.

“이협우 의원! 당신 아까 장 부통령을 처리해 버리라고 했는데 그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처리한다니, 없애버린다는 뜻입니까? 앞으로 우리는 장 부통령의 신변에 특별히 조심하겠습니다!”며 맹렬한 기세로 이협우 의원을 압박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총을 감당하지 못했던 이협우는 고개를 떨구고 묵묵부답했다. 기사에는 “차라리 벙어리라면 또 몰라도 그의 반 벙어리가 더욱 가긍(불쌍해)하다”고 맺고 있다.

내남면을 누비며 약자에게는 한 없이 강했으나, 국회에서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는 한 없이 약했던 사람이었다.

1958년 이협우는 국회의원 3선에 도전했다. 이 선거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이협우는 권총을 들고 다니며 선거를 했다. 유지와 유력 후보들을 총으로 협박하고, 후보 등록을 방해했다. 당시 언론엔 이렇게 기록 돼 있다.

입후보등록 마감. 유혈과 소란 속에 숨 가쁘게 지나간 10일간 이었다. 특히 경주 월성 갑구에서는 허다한 등록방해사건이 생기고 여태껏 야당후보의 등록공고는 나지 않았다고 한다. 월성 갑구에서 출마하는 자유당 공천 이협우 의원의 강파른 얼굴이 저절로 떠오른다. 이협우, 이협우, 이협우. 전 국민이 기억해야 할 이름인 것 같다."

-1958년 4월 11일 자 경향신문

부정투표도 있었다.

“3장이나 7장 감싸고 이협우에게 투표하는 일도 있었다.”

-1958년 7월 15일 자 경향신문

어쨌든 그는 42.81%의 득표율로 손쉽게 ‘3선 국회의원’이 됐다. 그러나 여전히 국회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4대 국회에서는 한 마디 안 하실 겁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10년 동안 국회에서 발언을 하지 않겠다”는 기이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드문 3선 국회의원이나 했지만, 상임위원장 한 자리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쓸모는 따로 있었다. 1958년 12월 초, 국회에서는 국가보안법 입법을 놓고 대치 중이었다. 자유당은 국가보안법에 반대하는 민주당을 용공단체, 역적(이적)단체로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양당 국회의원들이 거친 설전을 이어가고 있던 중 이협우는 민주당 우희창 의원에게 달려들었고 이를 신호로 양당 의원들의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국가보안법 날치기 입법 당시 모습.jpg
국가보안법 날치기 처리 후 국회 현장 모습.

이협우는 ‘몸싸움 전문 국회의원’으로써 여야 충돌이 있을 때면 항상 선두에 있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고 4대 국회가 해산되면서 이협우의 국회의원 생활도 끝이 났다.


4. “사형보다 더한 극형 있다면”


1957년 2월. 국군 해병대에 복무하고 있던 유칠문 씨는 이협우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내남면 출신으로 1949년 3월 8일 유 씨 일가족 8명이 이협우 손에 죽을 당시 친구 집에 있어 목숨을 건졌다. 부산으로 도망친 유칠문은 1954년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그러나 가족은 몰살당했고, 고향엔 이협우가 있어 한 번도 휴가를 쓰지 않았다고 했다. 

휴가를 쓰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해병대 장교들이 유 씨를 불러 조사했고, 유 씨는 자신의 형편을 털어 놓았다. 해병대 장교들은 이협우가 유 씨 부모가 소유하고 있던 2659평의 토지를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유칠문 씨는 해병대 장교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소송에 나섰다. 이협우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국방부 장관에게 ‘군인이 정치에 간여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유칠문 씨를 도와준 해병대 장교들은 강제로 전역을 당했고, 유칠문 씨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협박을 받은 뒤 고소를 취하했다. 그러나 현직 국회의원을 상대로 한 이 소송은 언론에 적지 않게 보도됐으며, 유족들이 뭉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숨죽이고 있던 유족들이 일어났다. 1960년 6월 16일 유족 75명은 이협우와 이한우를 상대로 살인, 방화, 강도 혐의로 대구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대구지검 최찬식 검사는 경주경찰서 내남지서 전·현직 경찰관을 모두 소환하는 등 적극적으로 수사에 임했다. 최찬식 검사는 학살사건 가운데 입증 가능한 것을 정리해 내남면민 76명을 살해한 혐의로 이협우·이한우를 기소했다.


“무법천지인데 무슨 진정서가 소용 있느냐”


1961년 3월 6일 1심 재판부는 이협우에게 사형을, 이한우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2심 재판이 진행되던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북한에게 이롭게 한다’는 이유로 유족들을 잡아들였다. 유족회를 결성한 김하종은 징역 7년, 유족회 간부였던 김하택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됐다. 분위기가 바뀌자 증언들도 바뀌기 시작했다. 유족 중 한 사람은 이협우에게 유리하게 증언을 바꾸다가 허위증언으로 징역 6개월을 받기도 했다.

허위증언까지 드러났지만 재판은 갈수록 유족들에게 불리해졌다. 확실한 증언들이 애매한 증언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2심 재판부 강안희 판사가 “9가지 공소사실 중 다시 의심되는 점이 있기는 하나 의심되는 점은 피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것이 형사소송법상 대원칙”이라며 이협우 손을 들어주면서 무죄를 선고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1962년 6월 28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재판 당시 이협우 측 변호인들은 유족에게 “그런 억울한 일이 있으면 왜 당시 진정서를 내거나 고소를 하지 않고 지금 와서 이러느냐”고 물었다. 유족들은 “무법천지인데 무슨 진정서와 고소가 소용 있으며, 운이 좋으면 살고 운이 나쁘면 죽는 것이 당시 실정이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한편 검찰에서는 1962년 이협우 일당이 내남면민 9명을 죽인 사실을 추가로 밝혀내고 별건의 재판을 걸었다. 이 재판 역시 1심에서는 사형이 선고됐으나 2심과 대법원에서는 무죄가 선고됐다. 최종적으로 1963년 5월 15일, 이협우는 자유의 몸이 됐다.

“증거 상 드러난 피고인들의 죄과에 대하여 형법상 사형보다 더한 극형이 있다면 본 검사는 서슴지 않고 그 극형을 택할 것이나 부득이 현행법상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한다”는 이영호 검사의 분통에 찬 논고도 그렇게 허공의 메아리가 돼 버렸다.

이협우는 1974년 대구매일신문 인터뷰에서 “그때 다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경북 경주군 내남면은 한국전쟁 당시 단 한 명의 북한군도 출몰하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 이협우는 자신과 함께 나고 자란 주민들을 학살했고, 그 공포를 이용해 젊은 나이에 무려 3선 국회의원이 됐다. 재판이 열렸지만, 처벌받아야 할 사람은 처벌받지 않았고, 되레 피해자들이 처벌받았다. 한국현대사는 이렇게 최소한의 기본과 상식마저 무너뜨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협우는 경주에 계속 머물다 1987년 사망했다. 그의 나이 66살이었다.


이협우 연표

-1921년 경북 경주군 내남면 출생.

-1940년 대구농림보통학교 졸업.

-1943년~1945년 경주군 내남면 농업기수(면 서기).

-1947년 내남면 대동청년단장.

-1949년~50년 내남면 대한청년단장. 민간인 학살 시작.

-1949년~50년 내남면 민보단장.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1958년 5월. 제4대 국회의원.

-1987년 사망.

※취재 자문 : 채현국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 전갑생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다음 3화는 ‘정치깡패의 원조, 일본 국회의원 박춘금’편입니다. 22일(월) 업데이트 됩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