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선배에게 배운 기술 마산수출자유지역 생기면서 재봉틀 수리기술 진가 발휘

"생기야, 큰 데서 졸병 짓 하는 것보다 작은 데서 대장질 하는 게 낫다. 어서 넘어 오이라."

그는 선배의 말 한마디를 듣고 마산과 인연을 맺었다. 그로부터 46년이 흘렀고 부산 국제시장에서 재봉 수리 기술을 배우던 김생기 씨는 경남지역 재봉틀업계의 산증인이 되었다.

"1969년 기술을 가르쳐 주던 선배가 마산에 특수미싱가게를 차렸다고 연락이 왔어요. 군대에 가기 전이라 사회경험도 쌓고 타향살이도 해 볼 겸 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향인 부산을 떠나 마산에 올라왔죠."

김 씨는 선배 가게에서 한 해를 보내고 입대를 했다. 선배는 손기술과 눈썰미가 남달랐던 그에게 제대 후 꼭 마산으로 올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가 1973년 제대 후 다시 찾은 마산은 변해 있었다. 그의 미싱 수리 기술이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제대하고 돌아오니까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생겼어요. 그곳이 신천지였죠. 봉제공장, 신발공장, 가발공장, 우산공장 등 회사마다 미싱을 안 쓰는 곳이 없었어요. 공장을 상대하던 특수미싱을 취급하던 가게도 많이 없어서 일을 많이 했죠."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성동 일광미싱에서 만난 김생기 씨. /박민국 기자

일 복이 터진 김 씨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선배 가게와 재봉틀 수리하러 다니던 수출지역 회사 간의 노동 대가 차이가 너무 컸던 것이다.

"저는 부산 국제시장에서 기술을 배운 미싱 정통파라고 늘 자부했는데 월급에서 차이가 너무 났어요. 당시 선배 가게에서 한 달 7000원을 받고 일했는데 수출자유지역 회사에 근무하는 미싱 기술자들은 4만 5000원 정도 월급을 받았죠. 회사 담당자보다 미싱 기술은 제가 한 수 위라고 생각했지만, 일본인 기술자가 많던 수출자유지역에 취업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꿨죠."

간절히 원하고 열심히 하면 소원은 이루어지는 법. 그의 재봉틀 수리 기술을 눈여겨보던 구로가와우산 공장장은 선배 가게에 찾아와 김 씨 스카우트를 제안했다. 같이 기술밥을 먹던 선배는 일주일 고민 끝에 그의 입사를 축하해주었다. 1975년 김 씨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인 정규직 기술자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마산수출자유지역으로 출근하며 산업 역군이란 소리를 들을 때는 뿌듯했죠. 회사에 근무하며 당시 일본에서 생산되는 미싱은 거의 다뤄봤죠. 그때 습득했던 미싱 기술이 인생 밑천이 된 거죠."

그는 7년간 우산공장에 근무했다. 다니던 우산회사가 대구로 공장 이전을 하면서 같이 가자고 권유했지만, 그는 마산 정착을 택했다.

"살면서 기억에 남는 연도가 두 개 있어요. 1969년은 제가 마산 땅을 처음 밟은 해고 1982년은 마산에 뿌리를 내리자고 결정한 해죠. 특히 1982년은 마산에서 전국체전이 열렸죠.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제 상호로 가게 문을 열었고요."

그에게 1982년은 특별한 해이다. 315대로(구 중앙로) 월영광장에서 석전삼거리 구간이 개통된 것도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마산에 신작로가 생기며 기존 상권보다 저렴한 보증금과 임대료로 점포를 구할 수 있었다. 또한 백색전화·청색전화로 구분하며 권리금을 주고 사야 했던 전화기도 마산에 전국체전이 열리면서 대량 보급되기 시작했다. 주변 여건이 그의 사업을 기다렸다는 듯 잘 풀렸고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성동에 있는 일광미싱은 그렇게 탄생했다.

"소방도로가 나서 한 번 점방을 옮긴 것 말고 여기서만 33년이네요. 미싱가게인데 재봉틀 한 대 없이 전화기와 수리 도구만 가지고 시작했죠. 그래도 마산 온 지 13년 만에 제 가게를 가졌으니 반은 성공한 거였죠."

그의 나머지 성공도 멀리 있지는 않았다. 1983년 경남도청이 이전하고 국가산업단지 조성이 이루어지며 창원엔 아파트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상가마다 옷 수선가게와 커튼가게가 자리를 잡죠. 그곳에 신규 시장이 컸어요. 장사가 미싱 배달만 하나요. 사용법도 일일이 다 전수해야죠. 기계 수리라도 들어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죠."

2015년 그의 나이 예순여섯, 46년 미싱사도 황혼에 접어들었다. 특수재봉을 지탱하던 공장들은 자취를 감췄고 맞벌이에 바쁜 주부들에게 재봉틀은 전시용 실내장식 소품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도 미싱 곁을 떠나지 못한다. 자신이 팔았던 재봉틀이 언제 탈이 나 연락이 올 줄 모르기 때문이다.

"미싱이 한물갔다고 하지만 머리에 쓰는 모자부터 양말에 신발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봉틀 안 거치는 것이 없어요. 욕심 안 부리고 딱 10년만 더 미싱기술자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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