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⒁ 마산지역 일제통치 탄압기구

일제강점기 이전 19세기 마산의 도시형태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창원면 지역에 창원도호부가 있었고 마산포 쪽에는 세금을 거두는 조창이 있었다. 마산포 일대는 18세기 접어들어 생긴 원산, 울산 방면 교역을 위해 동해와 서남해를 연결하는 포구 시장으로 기능을 했다. 마산포는 1899년 5월 열강이 주도하는 국제 정세 속에 개항을 하면서 대전환을 겪는다.

마산포 남쪽 2㎞ 거리에 있는 창원군 외서면 해안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에 각국 공동조계지(개항장 치외법권 구역)라는 이름으로 훗날 신마산이라 부르게 되는 계획도시가 들어선다. 이곳은 특히 마산 조계지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 간 세력 다툼이 치열했는데 1905년부터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결국 신마산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후 일본은 신마산 일대를 행정 중심으로 삼은 것은 물론 현 진해지역 군항 조성과 함께 이 일대 병영 건설에도 박차를 가한다. 일본인 소학교와 병원, 이사청(통감부 지방기관)과 일본제일은행출장소 등 공공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일본인 이주어촌인 지바무라(千葉村)가 가포에 들어선 것도 이때 일이다.

◇신마산 일대 일제 통치 흔적 = 일본인 거류지이자 진해 군항을 뒷받침하는 병영으로 조성된 신마산에는 일제 통치 흔적이 여럿 남아 있다.

일본 자국민 보호와 개항장의 외교·통상 업무 등을 담당했던 마산 이사청./자료사진 디지털창원문화대전

현재 경남대학교 평생교육관 자리는 개항과 동시에 일본영사관이 들어선 곳이다. 일본영사관 마산분관으로 문을 연 이곳은 개항 이듬해인 1890년 1월 일본영사관으로 승격됐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공포하는데 이에 따라 이곳은 1908년 마산 이사청으로 탈바꿈한다. 통감부 지휘·감독을 받는 이사청 주요 기능은 일본 자국민 보호와 관리 업무를 계승함과 동시에 개항장의 외교·통상 업무를 담당한 창원 감리서 폐지와 함께 그 업무도 인수했다.

다시 말해 식민 수탈의 중심 관청이었던 셈이다. 현재 반월동 통술거리 일대는 일본 상권 중심인 쿄마치 거리 일대였다. 이곳 거리는 지금도 옛 일본식 건물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어 마산 근대 문화를 느끼기에 좋은 곳이다. 상업이 발달한 이곳은 현금 흐름 또한 활발했을 터. 또 인근 월남동 성당 자리는 일본 제일은행 마산출장소가 영업을 하던 자리다. 마산에 세워진 최초 금융기관이기도 한 이 출장소는 1911년에는 조선은행 마산출장소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조선식산은행에 흡수됐다. 일본 제일은행은 을사늑약 이후 일본인 재정 고문에 의해 화폐 개혁을 단행하고 신-구 화폐 교환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 금융 자산을 수탈했다. 이 점에서 마산출장소 역시 일본의 지역 경제 수탈 첨병 역할을 한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인 금융 자산 수탈을 자행했던 일본 제일은행 마산출장소./자료사진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진해 군항과 함께 병영화도 진행 = 을사늑약 이후 일본 군대 마산 진출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러일전쟁 승리와 함께 진해 군항 건설에 박차를 가하던 일본은 1908년 신마산 일대 병영 건설에 착수해 1909년 7월 완공한다. 이때 진해만 요새 사령부와 진해만 육군 중포병 대대를 진해에서 마산 월영동으로 이동시킨다. 그해 12월에는 대구에 주둔한 헌병분견소를 신마산에도 설립함으로써 병영 체계를 완성한다. 진해만 요새 사령부는 이후 1913년 진해로 다시 이동하지만 중포병 대대는 해방 때까지 남아 군사 활동을 펼쳤다.

현 해운중학교 인근 창원시내버스협의회 사무실 자리에 있었다. 이곳 지형은 지금 봐도 나지막한 언덕배기를 형성하고 있다. 포대 건설 당시는 바로 앞 해안이 매립되기 전이라 바로 바다와 맞닿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포대에서 일본군은 가끔 포 사격 연습을 했는데 그 표적은 돝섬 너머 삼귀지역 구실 해안 야산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산헌병분견소는 김해·웅천·진해·진동·배둔·장목 등 7개 분견소를 담당하면서 마산뿐만 아니라 경남 인근지역에서 활동하던 많은 애국지사를 탄압했다. 1919년 3·1항일독립만세운동 때는 시위 진압을 위해 삼천포까지 헌병을 파견했다. 3·1운동 이후 일본은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꿔 경찰이 치안을 맡도록 한다. 이에 1921년 현 마산중부경찰서 자리에 있던 헌병분견대 건물을 증축해 마산경찰서로 사용하고 1926년 마산합포구 월남동 3가 11 현재 자리에 분견대 건물을 새로 지어 이전했다.

마산뿐만 아니라 경남 인근지역에서 활동하던 많은 애국지사들을 탄압했던 마산헌병분견소. /경남도민일보 DB

지금은 건물 주위로 터가 한정돼 있으나 신축 당시에는 인근에 분견대장 관사가 있는 등 대지가 꽤 넓었다. 붉은 벽돌에 직사각형 건물로 권위적이면서도 서양식 부재와 건축 양식을 써 이 같은 이미지를 다소 완화한 모습을 지녔다. 이 덕분인지 해방 이후에도 옛 보안사령부 마산파견대가 '해양공사' 간판을 달고 이 건물을 사용하면서 민주화 인사 사찰을 하기도 했다.

◇항일독립운동가의 무덤 같은 곳 = 우리나라 근대 감옥 역사는 1908년 문을 연 서대문 형무소에서 시작한다. 일본은 1907년 '경성 감옥서 설치 건'을 반포하고 이듬해 전국 8곳 감옥 명칭과 위치를 정해 공포했다. 하지만 항일 열기가 고조하면서 감옥이 부족해지자 전국에 분감을 설치하는데 마산에도 1910년 7월 1일 부산감옥 마산분감이 만들어졌다. 애초 부림시장 입구 경무청에 세워진 마산분감은 1913년 오동동(현 삼성생명·천주교 마산교구·오동동 공영주차장 자리)으로 이전한다. 마산부민들은 조선인 거주 지역에 일본이 고의로 음산한 건물을 짓는다며 이전 요구 대회를 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항일독립투사가 투옥됐던 부산 감옥 마산 분감./자료사진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항일독립투쟁에 참여한 무수한 사람이 투옥됐다. 3·1운동 때는 마산뿐만 아니라 함안 군북지역 관련자 수십 명이 수감되기도 했다. 구마산장터 봉기 때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투옥된 애국지사와 학생들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형무소 밖 독립 만세 소리에 간수 박광연이 간수복을 벗어던지고 시위대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이 밖에도 청산리 전투 승전보 배포 사건,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동양제사주식회사 진해 공장 노동자 쟁의 사건, 반일 문학 그룹 독서회 사건, 교사 신사 참배 반대 사건 등과 관련해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고통스러운 수감 생활을 했다.

◇근대 건축물 보존 틀 안에 스토리 담아야 = 대부분 항일독립운동 사적들이 현시대에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반면 일제통치와 탄압 기구들은 근대 문화유산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아 보전과 기억의 손길이 다수 미치고 있다. 경남대 평생교육관, 월남동 성당, 오동동 공영주차장 등에는 이곳이 일제강점기 어떤 곳이었는지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마산헌병분견대는 표지석과 함께 옛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희소가치와 활용가치가 높다. 하지만 단순한 표지석만으로는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거 이들 장소에서 일어난 일제 억압과 수탈, 폭력을 통해 이런 일이 다시 없도록 미래 교훈을 되새기기에 부족하다. 이 점에서 오랫동안 마산헌병분견소 건물을 마산근대역사관 또는 근·현대 역사기록관 등으로 활용하자는 지역사회 의견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는 죽어있는 건축물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역사적 기억을 되살리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논의가 지역사회에 여러 차례 이뤄졌음에도 정책 실현이 요원한 점은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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