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영화에 깊은 관심을 보여온 이성철 창원대(사회학과) 교수가 <경남지역 영화사-마산의 강호 감독과 창원의 리버티늬우스>를 발간했다.

이 교수는 지난 2월 발표한 논문 '일제강점기의 조선영화 : 1920∼30년대 경남지역 강호(姜湖) 감독의 활동을 중심으로'와 2012년 7월 펴낸 논문 '지역 영화사 오디세이 : 1950년대 경남지역 미국공보원(USIS)의 영화제작을 중심으로'를 묶어 책으로 냈다.

책은 제목 그대로 마산의 강호 감독과 창원의 리버티늬우스를 처음 공개한 서적이다. 이는 한국영화사에 공백으로 남아있던 것이다.

강호(1908∼1984)는 경남 최초 영화감독이다. 창원 마산합포구 진전면 봉곡리 출신이다. 그는 1927년 조선영화예술협회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소속원으로 참여하며 영화 공부를 했다. 카프 영화부에서 만들어진 영화 <유랑>, <혼가>, <암로>, <화륜>, <지하촌> 가운데 <암로>와 <지하촌>을 연출했다. 또 미술전공분야를 발휘해 노동운동 지원에 나서기도 했고 영화비평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하지만 1946년 이후 행적은 그의 월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경남은 1910년대 마산극장이 생기면서 영화 관련 역사가 비교적 오래됐다.

책에 따르면 창원에는 1952년 미공보원 상남영화제작소가 설치돼 15년간 활동했다. 서울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미공보원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진해로 거점을 옮기고 1952년 창원 상남면 쪽에 다시 새 터전을 마련했다.

상남영화제작소는 1967년까지 미국의 대내외 핵심 선전기구 역할을 담당했다. 이곳에서 주간 '뉴스영화'(리버티 뉴스) 721편이 제작되고 특정 메시지 전달을 위한 문화영화도 수백 편이 만들어졌다.

이렇듯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 영화사가 <경남지역 영화사-마산의 강호 감독과 창원의 리버티늬우스>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교수는 "강호 감독은 중앙에서 활동했지만 그의 활동 내용이 카프의 문화운동이었다. 또 월북인사라는 점이 그를 진지하게 검토할 수 없는 레드콤플렉스가 작용했다. 리버티늬우스 산실이었던 미공보원 상남영화제작소도 본격적인 탐구는 이뤄지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창원이 '한국 영화의 메카'였다는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지역영화사에 대한 연구는 한국영화사 내용과 깊이를 더욱 풍부하게 한다고 강조했다.

책은 논문을 구분해 1·2부로 구성되어 있다. 151쪽, 호밀밭,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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