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13) 마산지역 사회·학생운동

창원시 마산지역의 항일독립 열망은 사회 전반에 퍼져 다양한 형태로 터져나왔다.

이는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내재적으로 축적된 외세의 경제 침탈에 대한 저항 경험과 맥이 닿는다.

1899년 개항 이듬해 러시아(현 가포 일대)와 일본(월영동 일대)에 조차지를 내준 이후부터 마산민과 외세, 특히 일본과 갈등은 치열했다.

외국인 토지 불매운동, 사립 일어학교 반대와 폐쇄 운동, 일본인 광산 이권 침탈 항거, 구마산 시민 중심의 장시 환원 운동, 신상회사(상인 중간착취 기관) 혁파와 구마산 상인 투쟁, 일본군 병참 수송 부역 거부 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개항 덕에 일찍이 국제해양도시로 성장한 마산은 러시아와 일본 외에도 호주 선교사와 중국 화교 진출도 활발했다.

이들이 들여온 새로운 사상과 문화도 항일독립 정신을 기르는 데 중요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1919년 3·1항일독립만세운동을 호주 선교사 영향을 받아 세워진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교사, 학생이 주도적으로 이끈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저항 마산' 기운은 일제강점기 전반에 걸쳐 민족주의 독립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 사회 전 영역에 걸친 항일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데 그 흔적이 마산지역 곳곳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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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와 상해에 독립자금을 댄 원동무역 = 마산합포구 남성동 동서북9길 15-2. 남성동 성당 맞은편에 이곳이 원동무역주식회사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원동무역주식회사는 마산지역 선각자 옥기환 선생 등이 1920년 5월 16일 자본금 50만 원으로 설립한 회사다. 마산지역 최초 주식회사이기도 하다. 이곳 모태가 된 원동상회는 항일비밀결사체인 조선국권회복단 자금원이었고 자금을 지원받은 이들은 마산지역 3·1항일독립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도 했다. 원동상회가 이들과 관계를 맺은 것은 안확 선생에 의해서였다. 안확과 옥기환이 노동야학을 중심으로 함께 활동한 것이 인연이 됐다. 원동무역주식회사로 바뀐 후에도 회사는 상해임시정부나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회사 이익금 중 일부를 군자금으로 지속 제공했다.

◇마산 근대적 시민운동 산실 마산민의소 터 = 마산합포구 창동 오동서 6길 28. 옛 '시민극장' 자리였던 이곳에서 1908년 마산 주민들이 자생적으로 조직한 마산민의소가 문을 열었다. 이곳은 1899년 마산포 개항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경제 침탈에 맞서 상권 수호와 해안 매축권 확보 투쟁에 나섰던 마산 주민의 저항의식이 결집해 설립에 이르렀다. 일제에 의해 민의소가 강제 해산된 후에는 1920년 6월 마산구락부가 이어받아 회관으로 사용했다. 마산구락부는 이 건물을 사회·주민권익·민족 문제 등을 논하는 토론장 겸 명사들 강연장으로, 또 1921년에는 정규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교육하는 마산학원으로 활용했다. 1924년 마산청년회, 1925년 독서회 창립총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1927년에는 신간회 마산지회 설립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마산구락부는 그해 마산노동회에 회관 일부를 사무실로 사용하도록 내주기도 했다. 마산 근대적 시민운동 산실이던 회관은 이후 1935년 마산부의원이자 마산극장을 운영하던 일본인에게 비밀리에 헐값 매각돼 공락관이라는 극장으로 신축되고 만다. 해방 후 시민극장으로 마산시민들과 희로애락을 같이했으나 옛 마산 시민운동이 일어난 역사적인 공간임을 기억하게 해줄 표지석 하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마산조면공장 노동운동 한 획 그어 = 마산합포구 북성로 46. 현재 삼성회관 건물이 들어선 이 일대는 옛 마산조면공장이 있던 자리다. 일제강점기 제조업과 상업이 발전한 마산지역은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1924년 3월 1일 마산조면공장 직공 18명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마산구락부회관에 모인 직공들은 결의안 7개 조를 정한 후 공장주와 교섭했다. 주요 내용은 일급 2할 인상, 일과 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할 것, 공장 사정으로 해고할 때는 3개월 근속자에는 일급 40일분을, 6개월 근속자에는 일급 20일분 지급할 것, 이번 사건으로 희생자를 내지 말 것 등이었다. 사태는 공장주 양보로 타결됐는데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그해 12월 분산적이었던 조면공 100명이 결속해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위생시설 설치, 식사시간·월별 공휴일 확보 등을 내걸었다. 극한 노사대립은 경찰 개입으로 이어졌으나 마산노농동우회 조정으로 노동자 측 9개 요구가 관철될 수 있었다. 마산지역 본격적인 노동운동의 시작으로 지역 노동운동사에 의미가 깊은 사건임에도 이를 기억할 만한 장치가 없는 것은 아쉽다. 마산이 1970년대 노동자 도시로 이름 날린 데 비하면 초라한 대접이라 할 수 있다.

◇교육·문화운동 거점 문창교회 = 마산합포구 추산동 북성로 19. 지금은 찜질방 건물이 들어선 이곳은 1901년 호주에서 온 선교사 손안로(A. Adamson) 목사에 의해 문을 연 문창교회가 있던 자리다. 문창교회는 유치원과 야학교를 설립해 어린이 조기교육, 계몽운동에 힘썼다. 신식 교육기관인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를 설립해 교육에도 앞장섰다. 1920년대 문창교회는 마산지역 문화운동을 이끈 기독교 계통 면려청년회 집회 장소로도 사용됐다. 면려청년회는 종교활동 외에 강연회, 토론회를 활발히 해 교육 보급, 노동 장려 등을 주창했다. 특히 기독교 전도에 머물지 않고 시대적 사명에 대한 청년들 자각을 요구하는 등 당시 마산지역 젊은층의 항일 의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했다.

◇학생들 신사참배 거부하고 일제 패망 꿈꿔 = 마산합포구 회원동 3길 28. 지금은 한효아파트가 들어선 자리는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창신중·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다. 창신학교는 3·1항일독립운동 주도 세력 중 하나였는데, 그 항일정신은 1930년대 말에도 여전했다. 당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각종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1937년 12월 17일 중국 난징 함락 보도로 일본군 사기 저하를 우려한 일본은 마산시내 전 학교와 관공서가 참여하는 제등행렬을 강요했다. 구마산에서 출발한 행렬은 신마산 신사 입구까지 일렬로 대기하며 차례를 기다렸는데 이때 창신학교는 차례가 되었음에도 참배를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일본 경찰은 이에 교사 전부를 연행하고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창신학교는 이후로도 동방요배, 일장기 경례, 신사참배, 교육칙어 암송 등 행사를 계속 거부했다. 신사참배 강요에 맞선 전국 기독교계 학교는 1936년부터 탄압을 받아 속속 폐교됐는데 1939년 창신학교도 그 칼날을 비켜가지 못했다. 폐교된 창신학교는 1948년 경남노회에 의해 초중급학교로 설립돼 지금에 이른다. 1944년 6월 당시 5년제인 마산중학교(현 마산고등학교) 2·3·4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마중독립단이 조직됐다. 이들은 학교 지하 창고를 비밀 아지트로 삼아 국외 독립운동 상황과 국내외 정세 등 정보를 입수하는 등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조선 역사와 한글을 배우고, 뜻이 통하는 학우를 은밀히 포섭하며, 가능한 시기 국외로 탈출한다는 행동강령을 세우고 활동을 해나갔다. 그러나 7월 중순 일본 경찰에 비밀이 탄로 나 핵심 인물이 체포되면서 마중독립단은 와해하고 만다. 마산고등학교 교정에는 이를 기념하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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