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초조·피로 호소하는 사람들 늘어…내 마음이 삶의 완성 찾아나섰다는 신호

출장을 갔다가 돌아와 며칠 후에 지갑을 찾으니 없다. 나이가 들고 건망증이 더해지면서 전에도 가끔 있었던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조금 있으면 어디선가 나오겠지' 기다렸지만 허사다. 점점 마음이 불안해진다. 출장 동선(動線)을 따라 기억을 더듬어서 이리 저리 전화 해봐도 기다리는 답은 없다. 자동차와 가방 등 숨었을만한 곳을 다 뒤졌는데도 끝내 없다. 약간의 현금은 그렇다 치고 신분증과 면허증과 신용카드가 있어 마음이 불편해진다. 지갑 하나 챙기는 것을 잘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다가 '혹시 누가 훔쳐간 것은 아닐까?'하는 망녕된 생각들도 문득문득 일어난다. 오락가락 일어나는 마음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기를 기다린다. 한 번 출렁거린 마음을 진정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람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서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마음의 본래는 요란함이 없다. 다만 경계를 따라 이렇게 저렇게 움직인다. 경계를 따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마음은 그렇게 바쁘게 움직인다. 육근(六根)의 작용을 따라 가지가지 분별이 일어나고 그 분별을 따라 천만가지 시비이해가 생긴다. 그래서 우리 삶은 늘 시비(是非)를 따라 출렁이고 이해(利害)를 따라 요동을 친다. 결국 마음은 지치고 피곤하다.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현대사회는 피로사회다. 그래서 짜증도 많고 분노도 많다. 상처도 깊다. 마음의 내상이 깊으면 이유 없는 우울증도 생기고 맹목적인 분노충동도 일어난다. 문제는 마음의 요동을 온전하게 쉴 수 없다는 데 있다. 절제나 조절이 안 되니 마음의 자유가 없다. 자유가 없으면 노예다. 그것이 물욕이건 분노건 자기 주도적으로 조절하고 절제하고 자유 할 수 없다면 노예와 다를 바 없다.

불안과 초조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연을 들어보면 별것도 없다. 그저 답답하다는 사람, 외롭다는 사람들도 많다. 왠지 삶이 푸석푸석해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고, 고작 이것이 내가 꿈꾸었던 인생인가 하는 비관이 생기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인간은 영적(靈的) 존재다. 물욕은 물론 성취나 명예만으로도 충족할 수 없는 존재다. 깊은 이성(理性)의 탐구나 감성(感性)의 몰입조차도 완전한 해답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징후를 걱정할 것은 없다. 비로소 내 마음이 본능적으로 삶의 완성을 찾아나서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를 찾는다. 그릇된 믿음에 매몰되지만 않는다면 종교는 여전히 삶의 해탈과 자유에 대하여 인류가 축적한 가장 유력한 경험이다. 어지러운 말세이긴 하지만 그래도 불경(佛經)이나 성경(聖經)은 마음의 완전한 자유를 안내하는 최고 최선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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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템플스테이를 가거나 들로 산으로 조용히 마음의 휴식을 구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추정컨대 이런 흐름은 점차 마음의 실체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마음을 공부하면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마음은 온전한 삶을 풀어내는 키워드이자 시대적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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