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비춤]언론으로 본 육군 39사단'창원시대 60년'

'來五日(내오일)에 創設(창설) 39·50豫備師團(예비사단)'.

1955년 6월 25일 자 <경향신문> 기사 제목이다. 39·50사단 창설로 육군 방침인 10개 예비사단 창설이 완성됐다는 소식을 짧게 전한다. 39사단 역사의 시작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창설한 39사단이 창원으로 이전한 게 7월. 1955년 12월 25일 자 <경향신문>은 '39예비사단 본부청사 상량식'이 26일 창원 신축 공사장에서 열린다며 부대가 창원에 자리매김했음을 알린다.

39사단이 60년 '창원시대'를 마감하고 함안으로 옮긴다. 28일부터 다음 달 10일까지 부대 이전을 진행한다. 지난 60년 세월을 창원과 함께했던 39사단이 남긴 흔적을 옛 신문에서 찾았다.

1955년 창설 당시 39사단 사령부.

39사단 관련 사건·사고

신문이 사건·사고를 탐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다. 39사단과 얽힌 사건·사고 가운데 먼저 눈에 띄는 기사는 1959년 7월 22일 자 <동아일보>에서 찾을 수 있다. <동아일보>는 39사단 군수물자 횡령 사건으로 구속된 정모 소령이 새로운 사실을 폭로해 참모 장교 3명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39사단이 부채를 청산하고자 영외 거주자에게 급식미와 부식비 일부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게 사건 내용이다. 이 사건은 군 당국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진실 공방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국정감사로 넘어간다.

1959년 12월 17일 창원역 근처에서 여중생이 39사단 통근버스에 치여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이는 20일 자 <동아일보>에 보도된다. 1964년 1월 14일 자 <경향신문>은 돈을 받고 39사단에 대리 입대한 김모 씨가 적발된 사실을 보도한다. 당시 김 씨가 대리 입대 대가로 지인에게서 받은 돈은 1800원이었다. 같은 해 8월 2일에는 39사단에 입소한 ROTC 훈련생 2명이 마산 가포해수욕장에서 수영을 하다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건은 이튿날 <경향신문>이 보도한다.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1994년 9월 25일 <연합뉴스>는 통영에서 전 부인을 공기총으로 협박한 39사단 소속 예비군 중대장이 수배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1990년대 초 병참선 방호작전 토의. /39사단

3·15와 5·18

1960년 3·15의거 관련 기록 한 자락에는 39사단도 걸쳐 있다. 1960년 4월 13일 자 <동아일보>는 군이 39사단에 특별비상태세를 지시했다고 전하면서 '마산 소요사건 관련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어 16일 자 <동아일보>는 3·15의거 도화선이 된 김주열 군 얼굴에 박힌 최루탄 출처가 경찰인지 39사단인지 논란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같은 날 신문에는 이틀 뒤 예정인 39사단 병무소집이 상부 지시로 돌연 연기됐다는 기사도 있다. <동아일보>는 '각처에 일어나는 데모에 영향을 받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취한 조치'라고 정리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39사단은 정치권이 5·18 관련자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엮인다. 1993년 6월 23일 자 <한겨레>는 민주당이 5·16, 12·12, 5·18 관련자 핵심인물 19명의 명단을 공개하며 공직 사퇴를 요구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19명 중 한 명이 변길남 39사단장이다. 변 사단장은 5·18 당시 3공수 13대대장이었다.

1970년대 경남지역 대침투 작전에서 예비군 교육.

대통령 표창 19회 수상

1962년 8월 10일 남해면에서 합동수사대원을 사칭하며 주민에게 금품을 빼앗은 강도 3명이 체포된다. 8월 14일 자 <동아일보>는 남해경찰서 형사대와 함께 39사단 소속 최인섭 하사가 강도 3인조를 체포했다고 보도한다.

1966년 5월 21일 자 <동아일보>는 진양군 금산면 장산리 마을에 나타난 무장간첩을 39사단 수색대가 사살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대규모 간첩 작전으로는 1980년 12월 '남해 대간첩 작전'이 있다. 고정간첩을 북으로 데려가고자 침투한 적 부대와 맞서 펼친 작전에서 39사단은 20명을 사살하고 28명을 생포한다.

39사단은 대민 지원이 유난히 활발한 부대였다. 옛 신문에 남은 기록으로는 1966년 6월 10일 자 <매일경제> 보도가 있다. 당시 39사단은 5월 하순부터 무료 진료반 3개 조를 편성해 해안지대와 산간벽지 무의촌을 순회하며 진료 봉사를 진행했다. 1969년 9월 16일 자 <경향신문>은 창원군 용강리 구룡산 중턱 폐광지대에서 발생한 산사태 현장에서 39사단 구조반이 시체 13구를 파냈다는 소식을 전한다.

1989년 8월 1일 자 <한겨레>는 39사단 김해관리대대 병력 200여 명이 태풍·폭우 피해 복구작업에 나섰다고 보도했고, 1993년 8월 22일 <연합뉴스>는 창원과 사천지역에 집중호우 피해 복구를 위해 39사단이 투입됐다고 보도했다. 같은 해 10월 7일 자 <한겨레>는 남해 유조선 충돌로 기름 피해를 본 남해군 화전마을에 39사단 장병 100여 명이 기름 씻기 봉사에 나선 현장을 기록했다. 이 밖에 2000년 태풍 사오마이, 2002년 중국 여객기 김해 추락 참사, 2003년 태풍 매미 등 크고 작은 재해 현장에는 39사단이 있었다.

지난 60년 동안 39사단이 대민 지원, 우수 향토사단, 작전 우수 수행 등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횟수는 18회다. 오는 6월 '환경 보호' 공적으로 받을 대통령 표창까지 포함하면 19회 수상이 된다.

1981년 을지·쌍용훈련 입소 신고.

39사단 사람들

1966년 9월 3일 자 <경향신문>은 ‘군 떠나는 6세 꼬마 중사’라는 제목으로 조팔개 군을 소개한다.

조 군은 1965년 1월 아버지 조병서 씨가 백마부대에 입대하고 나서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걸식하던 중 휴가를 나온 조 상병과 함께 부대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부대장 특명으로 조 군은 백마부대에 입대하고 중사 계급을 받는다. 하지만, 백마부대가 월남으로 출병하면서 부대장 배려로 조 상병과 함께 조 군은 후방 부대인 39사단으로 보내지고 곧 명예 전역을 하게 된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휴가 중에 사고 현장을 찾아 생존자 3명을 구하고 시신 5구를 찾아낸 김종길 병장은 39사단 신병교육대 소속이다. 1995년 7월 4일 자 <경향신문>이 이 미담을 보도한다.

2003년 7월 28일 자 주요 일간지는 간 이식으로 아버지를 살린 아들을 일제히 소개했다. 미담 주인공인 최도섬 일병은 39사단 합천대대 소속이다.

당시 언론은 장교가 되고자 체력관리를 충실하게 했던 최 일병이 꿈을 접고 아버지를 살렸다는 점을 각별하게 다뤘다.

마지막으로 1983년 5월부터 1985년 11월까지 정훈병으로 근무한 개그맨 이경규 씨도 39사단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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