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22)김호상 마산대 복싱 감독

지난 3일 열린 매니 파퀴아오(37·필리핀)와 메이웨더 주니어(38·미국)의 경기를 지켜보던 김호상 감독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복싱인들은 이번 '세기의 맞대결'이 어쩌면 복싱의 인기를 재현할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복싱인들의 기대를 저버린 정반대였다.

그날의 경기는 도리어 복싱이 왜 종합격투기에 밀려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하는지 증명하는 꼴이 됐다. 약 2700억 원의 엄청난 대전료와 세계적인 관심과는 사뭇 다르게 '세기의 대결'은 졸전으로 매조졌다.

1970·8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복싱은 이제 비인기 종목의 대명사가 돼버렸다.

출산율이 현저히 줄면서 하나뿐인 자식에게 맞고 얻어터지는 복싱을 가르치는 부모들은 이제 없어졌다. 그래도 한국복싱은 세계선수권이나 각종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등 꾸준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1980년대 복싱 전성기에 운동을 시작해 지금도 마산대 복싱부 감독으로 경남복싱계를 든든하게 지키는 마산대 복싱부 김호상(44) 감독을 만났다.

김호상 관장이 복싱 자세를 취하고 있다.

◇타고난 복서 '승승장구' = 김 감독이 글러브를 처음 낀 1980년대는 한국복싱의 전성기였다. 홍수환, 박종팔, 문성길, 유명우, 장정구 등 희대의 스타들이 온 국민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각종 국제대회도 숱하게 열린 시기였다.

그는 1981년 내서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 권유로 복싱에 입문했다. 당시 학교에는 복싱부가 없었지만 그는 인근 체육관을 돌며 복싱을 배웠다. 복싱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던 아버지는 책과 TV를 보며 복싱을 공부했고, 아들을 복싱 선수로 키웠다.

그는 "초등학교 때 아버지는 매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나를 뛰게 했다. 10㎞에 달할 정도로 짧지 않은 거리였지만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달렸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천주산에 올랐는데, 다른 등산객이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혀를 찰 정도로 운동은 혹독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창원중과 경남체고에 진학해 본격적인 선수생활을 이어간 그는 소싯적부터 타고난 복서였다.

창원중 2학년 당시 처음 출전한 회장배 전국복싱대회에서 덜컥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 열린 전국소년체전에서도 그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 감독은 "중학교 때는 아버지와 단둘이 대회에 나가곤 했다. 버스를 타고 서울 문화체육관에 올라가면 아버지는 우승을 하면 버스, 지면 기차를 타고 내려간다고 반 협박(?)을 해 정말 열심히 싸웠던 기억이 난다"며 웃었다.

경남체고 2학년 때는 최고의 선수만이 출전하는 전국체전에서도 우승하며 복싱 유망주의 탄생을 예고하기도 했다.

이후 경남대에 진학한 김 감독은 1990년 열린 한미 친선복싱대회 라이트급에서 우승했고, 그해 열린 서울컵 국제대회에서는 3위에 입상했다.

그 덕에 그는 1989년부터 짧게나마 태극마크를 달기도 했다.

각종 대회에서 많은 메달을 땄지만 그에게 복싱은 언제나 배고픈 종목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변변한 실업팀이 없어 복싱으로 선수생활을 이어간다는 건 무리였다.

도민체전에서 3연패를 달성하면 취직을 시켜주겠다는 제의도 있었지만, 그가 보란 듯 3연패에 성공하자 없던 일이 돼버렸다.

김호상 마산대 복싱 감독은 "복싱은 주먹 싸움이 아니라 머리 싸움"이라며 선수들에게 운동뿐 아니라 독서도 강조한다. /박일호 기자 iris@idomin.com

◇복서 김호상에서 '지도자 김호상'으로 = 그는 대학생이던 1992년 우연한 기회에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등록금이 필요했던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 삼아 마산 양덕중에서 복싱 코치를 시작했다.

그는 지도자로선 초보였지만 운동에 대한 열의만큼은 여느 베테랑 지도자 못지않았다.

오로지 성적만으로 대우받는 현실에서 그가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 메달이었다.

그는 매일 같이 선수들과 함께 땀을 흘렸고, 1992년부터 1994년까지 3년 연속 소년체전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하며 '지도자 김호상' 이름을 전국에 떨치기 시작했다.

김 감독은 "당시만 하더라도 오로지 모든 운동이 성적에 맞춰져 있었다. 선수 인성이나 진학은 별개로 두고 운동 잘하는 선수 만드는 데만 열을 올렸다. 되돌아보면 그때가 성적은 전성기였지만, 내 지도자 인생에서 가장 부끄러웠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그가 양덕중 코치 시절 키워낸 김형규는 한국 중량급 아마복싱의 간판으로 성장해 지난해 열린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또 고교시절 무명에 가깝던 지덕성을 대학 랭킹 1위까지 키워낸 것도 지도자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확이다.

◇"꿈나무에 희망·비전 제시할 수 있어야" = 양덕중을 복싱 명문중으로 키워낸 김 감독은 2004년 마산대 복싱부를 창단해 지금껏 지도자 생활을 해오고 있다.

지도자 경력이 쌓이면서 선수들을 대하는 그의 스타일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무작정 운동만 가르쳤다면, 지금은 인간관계, 인성, 졸업 후 진로 등의 고민도 들어주는 카운슬러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김 감독은 선수들에게 독서를 강조한다. '복싱은 주먹싸움이 아니라 머리싸움'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그는 "책을 읽으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선수들이 복싱 동작은 알지만 그 동작의 정확한 명칭을 몰라요. 경기장에서 경기를 코치할 때도 전문용어 대신 '잽, 스트라이트'만 외치다 내려올 때가 잦아요, 선수들이 알아먹지를 못하니까요"라며 책을 강요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30년 넘게 복싱 밥을 먹는 그의 꿈은 단순하다. 내 자식에게 복싱을 권유할 정도의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내가 복싱에 입문할 때는 먹고살기 어려워 운동이 하나의 탈출구였다면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복싱이 단순한 운동에 그쳐선 안 되고 어린 꿈나무들에게 희망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주먹 하나에 운명을 걸고 세상과 맞섰던 무명 복서 이야기나 15라운드까지 치열하게 주먹을 주고받았던 복싱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남아있기에 복싱을 접을 수가 없다"면서 "우리네 삶의 축소판인 복싱이 하루빨리 이전 명성을 되찾았으면 하는 게 복싱인의 한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바라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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