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12) 마산지역 3·1운동

취재를 위해 박영주 경남대학교 박물관 비상임연구원을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학문당 앞에서 만났다.

박 연구원은 여느 때와 같이 반갑게 맞이했으나 '이건 아니다' 싶은 표정이 얼굴에 묻어나왔다. "김 기자, 마산지역 3·1항일독립만세 운동을 취재한다면서? 맞아. 창동사거리가 그때 당시 구마산 장터 일대였고 이곳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가 있었지." 번지수를 잘 찾았다는 생각에 안도했으나 그 미묘한 표정에 담긴 의미는 읽지 못했다.

"하지만 말이야.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터였던 이곳에서 만세 시위가 크게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마산 3·1운동이 시발한 지점은 아니야. 마산 3·1운동은 구 추산정 자리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지." 박 연구원은 서둘러 나를 추산정으로 이끌었다.

◇마산 3·1운동 시발점, 추산정 = 일제강점 초기 추산동 일대는 울창한 나무 숲이 둘러싼 데다 마산만이 매립으로 신음하기 전만 해도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풍광이 일품이라 사람 살기 좋았다. 덕분에 정수장과 도서관 등 편의시설도 밀집했다. 추산동 상징 건물이던 구 추산정 터에는 선비들이 활을 쏘며 심신을 수양하던 활터가 있었다.

옛 추산정 모습.

마산 공민들은 이곳에서 각종 회합과 여가 활동을 하며 일제 탄압과 경제 수탈에 지친 일상을 달랬다. 1919년 마산 3·1운동은 3월 3일 이곳에서 김용환이 독립선언서를 군중에 배포하는 일로 시작됐다. 김용환은 이날 고종 국장 참관을 위해 추산정에 모인 군중에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조선 독립과 항일 투쟁 당위성을 힘줘 말했다. 이 일로 김용환은 일본 경찰에 현장 검거돼 마산경찰서로 연행됐다. 이를 계기로 마산지역 항일독립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이로부터 일주일 뒤인 3월 10일 이승규·이상소·손덕우·임학찬 등 창신학교 관계자와 박순천·김필애 등 의신학교 교사, 한태익·이정기·이일래 등 창신학교 학생, 명도석·최용규·김용환·이정찬 등 지역 인사들이 모여 추산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들은 낭독 후 마산민의소(옛 시민극장)를 거쳐 구마산 장터로 행진을 꾀했다. 하지만 일제 헌병에 의해 참가자 전원이 연행돼 시위 계획이 중단됐다. 이때 후일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김용환이 모든 책임을 지고 구속되면서 16일 나머지 인원은 전원 훈방돼 다시 모의를 진행했다.

마산시립박물관 아래 옛 추산정 활터에서 본 마산시내 전경. 마산지역 3·1 항일독립만세운동이 발현한 옛 추산정 자리는 근·현대 '저항 마산'의 상징적 공간이지만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

◇'저항 도시 마산'의 중심 구마산 장터 = "훈방된 사람들이 다시 모의해 장날인 21일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 지금 창동사거리 일대야. 이곳이 구마산 장터지. 지금의 부림시장은 1920년대 공설시장화됐어. 당시 장터는 난전이라 창동사거리 일대 거리는 모두 시장으로 보면 돼." 박 연구원은 북마산 쪽으로 난 거리를 손짓하며 당시 위치를 설명했다.

구마산 장터 시위는 1919년 3월 한 달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21일 장이 서자 창원면과 내서면·진동면·진전면·진북면 등 농촌지역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날 시위는 창신학교와 의신학교 교사, 학생을 중심으로 펼쳐졌어. 교사들은 12일 일제에 항거하는 의미로 사직서를 내고 거리로 나섰어."

낮 12시 마산발 삼랑진행 열차 기적 소리를 신호로 이들은 '조선 독립'이라 크게 쓴 깃발을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보부상으로 가장한 김익렬은 가져온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군중에 배포했다. 이에 장터 군중도 합세해 만세를 부르며 가두행진을 벌였는데, 이때 시위 인파가 3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날 시위는 평화적 만세 시위였음에도 일본은 군과 헌병·경찰을 동원해 총칼로 강압·폭력 진압을 자행했다. 시위는 오후 6시까지 계속됐는데 39명이 검거되고서야 시위 군중이 해산했다.

구마산 장터에서는 그 뒤에도 두 차례에 걸쳐 항일독립만세 시위가 펼쳐졌다. 닷새 뒤 26일 장날에는 1차 시위에서 부당하게 투옥된 애국지사와 학생들 석방을 요구하며 2차 시위 불꽃이 타올랐다. 시위 군중 3000명은 북마산 주재소를 지나 마산형무소로 가 독립 만세와 함께 구속 인사 석방을 외쳤다. 시위대 일부는 형무소로 쳐들어가 수감된 애국인사 구출에도 나섰다. 군경을 동원한 일본의 무자비한 진압에 이날 시위에서도 14명이 체포 연행됐다.

두 차례 시위로 일제 감시와 탄압은 날로 심화했다. 하지만 마산 군중의 항일독립에 대한 열망은 식을 줄 몰랐다. 다음 장날인 31일 오후 4시에도 군중 2500여 명이 장터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날 시위에서도 마산형무소로 몰려간 시위대는 애국지사들 석방을 요구했다.

형무소 밖 독립 만세 소리에 옥중 지사들도 감옥 안에서 창밖을 향해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고조하는 만세 소리에 형무소 간수 박광연이 간수복을 벗어던지고 시위대 속으로 뛰어들어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이때도 무장한 일본 군경이 출동해 총칼을 휘두르며 또다시 시위 군중 20명을 연행했다.

박영주 연구원이 구마산 장터 3·1운동 시위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라고. '저항 마산'의 역사적 공간은 3·1운동, 3·15의거, 부마민주항쟁, 1987년 6월 항쟁 때 모두 겹쳐 있어. 마산의 대중 시위는 시대를 뛰어넘어 장소와 동선이 모두 비슷하지. 마산 시가지에서 열린 3·1운동은 이렇게 켜켜이 다져진 마산의 저항 정신의 시발로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이야."

마산시내 장날을 기해 시작된 대규모 만세 시위는 3월 말 들어 외곽 농어촌지역까지 확산해 4월 3일 마산 삼진 의거로 폭발하는 계기가 됐다.

이 폭발적 열망은 삼진지역을 거쳐 다시 마산시내로 되돌아온다. 4월 22일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학생들이 교내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친 것이다. 이곳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은 필사적으로 만류하려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튿날도 계속되는 학생들 독립 만세 열망에 학교는 이윽고 24일 임시 휴교하게 된다.

◇양극화로 상처받은 흔적 = 이렇듯 마산지역 3·1항일독립만세 운동은 연령·지역·계층을 망라한 민족운동으로 역사에 남았다. 하지만 96년이 지난 지금 후대 사람들이 그 역사를 직시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구 추산정 터는 마산 3·1운동 시발점이라는 역사적 상징성이 큼에도 현장에는 이를 알 만한 흔적이 없다. '추산정 터'임을 알리는 표지는 역사적 기억을 단순화할 뿐 이곳에서 있었던 사건을 통해 역사를 입체적으로 살피지 못한다. 구마산 장터가 있던 창동사거리 일대도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만세 시위가 있었던 역사 현장으로 기록으로 남겨 기념할 필요가 있으나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이에 대해 "창동 거리에 표지석이나 안내판을 세워 위치와 역사적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며 "창신학교나 의신여학교, 문창교회, 마산형무소 등 유관 사적지를 연계해 교육자료로 사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는 매년 대대적인 기념·재현행사가 열리고, 다양한 사적과 유적이 성역화한 삼진의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같은 시·공간 속에 역사적 기억의 양극화가 두드러지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추산정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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