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오백리] (25) 의령군 의령읍 정암진~함안군 법수면 석교천

남강변 더미 정암루 아래 너럭바위가 편안하다. 그 위로 쏟아지는 늦봄 햇볕이 벌써부터 따갑다. 햇볕에 반사되는 물결에 눈이 부시다싶어 뒤를 돌아다보면 정암교와 의령관문, 그리고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먼 빛으로도 활달한 기개가 느껴진다. 벽면 정암진 승전도가 임진란 당시를 보여주고 있다. 그 옆 충익공 홍의장군전적기념비는 1958년 군민 성금으로 건립했다고 한다. 정암진(鼎巖津). 홍의장군 곽재우가 의령군에서 어떤 역사적 인물인지를 단박 알 수 있는 상징적 현장이다.

곽재우(郭再祐)는 누구인가

1592년 선조 25년 4월 관군들은 백성들을 두고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부산에서 낙동강을 거슬러온 왜군이 호남 내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남강 하류인 이곳 정암진을 거쳐야 했고, 왜군은 빠른 속도로 진격을 해오고 있었다.

전쟁 발발 10일째 되던 4월 22일 의령에서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 최초의 의병 모집이었다. 이런 사정에는 곽재우(郭再祐·1552~1617)가 있었다. 곽재우는 남명 조식의 외손녀사위이자 제자였다.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일찍부터 남명의 가르침 속에 유학과 무예를 익혔다. 곽재우는 나라를 관군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유곡면 세간리 그가 사는 마을 앞 느티나무에 북을 달아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곽재우의 나이 41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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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의병은 몰려들지 않았다. 때마침 보릿고개로 피죽도 못 먹는 데다 봄철 농사 준비로 바쁜 백성들에게는 당장 끼니가 걱정일 뿐이었다. 관직을 멀리한 뒤 고향에서 재산을 불려 인근 일대에 내로라하는 거부로 알려진 그였다. 곽재우는 그의 재산을 다 털어 의병대에 식량과 그외 물품을 지급했다.

그제야 의병은 수십 명에서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그렇게 시작됐다. 무기라고는 평생 구경도 하지 못했던 백성들이 괭이나 지게 대신 손에 칼과 창을 들고 바위를 등에 지고 날랐다. 의병은 급기야 수천 명이 됐다. 곽재우가 이끈 의병대는 낙동강 기슭 지정면 기강나루에서 정암진 일대를 무대로 크고 작은 전투에서 거듭 승전고를 울렸다.

하지만 나라에서는 여전히 관군에게만 식량과 무기가 지급됐다. 전투물자와 식량은 동이 났다. 곽재우는 무력으로 토호 양반들의 창고를 털었다. 재산을 빼앗긴 토호들은 곽재우와 의병을 도둑으로 몰았다.

"나라가 있어야 너희들도 살아남는다."

당시 토호들을 향한 곽재우의 대성일갈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곽재우가 북을 걸었던 느티나무는 '현고수'로 불리며 천연기념물 제493호로 지정됐다. 마을 안에는 곽재우 생가와 문화공원이 조성돼 있다.

정암진 '의령관문' 옆에 있는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

지략가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에 얽힌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이다. 임진년 5월 말 왜장 혜경(안코쿠지 에케이)이 이끄는 왜군들이 배를 타고 남강을 건너 함안에서 의령으로 침공하려고 할 때였다.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은 남강을 사이에 두고 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왜군은 늪지대를 피해 진군하기 위해 정찰군이 안전지대에 깃발을 꽂고 있었다. 곽재우는 이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병사들아, 깃발을 모조리 뽑아 다시 그걸 늪에다 꽂아라."

깃발을 따라온 왜군이 도리어 강변 늪지대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곽재우는 매복한 의병들과 함께 일제히 활을 당겼다. 한밤중 어둠을 틈타 강을 건너던 혜경과 왜군은 오히려 몰살을 당했다. 승려이자 영주인 왜장 혜경도 왜국에서는 선견지명에다 뛰어난 장수로 알려져 있지만 곽재우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정암진 승첩(鼎津勝捷)이다. 왜군은 정암진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를 못했다. 곽재우와 의병은 의령·삼가·합천 등의 고을을 지켜냈고, 왜적이 호남 곡창지대로 침략해 들어가는 것을 막아냈던 것이다. 곽재우는 정암진을 마지막 보루인 양 지켰다. 그는 김시민의 진주성 싸움이 일어났을 때에도 지원군을 이끌고 가 승전고를 울리는 데 한몫을 했다.

곽재우는 휘하에 17명의 장수와 수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기강, 정암진, 현풍, 창녕, 영산, 진주성, 화왕산성 등의 전투에서 백전백승했다 한다. 곽재우의 승전을 듣거나 그의 모습을 본 백성들은 "홍의대장군 만세"를 외쳤다하니,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얼마나 찬양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곽재우전>은 곽재우의 무용담을 그린 조선시대 한글소설이다. 과장과 상상이 보태어진 부분도 있겠지만 당시 곽재우가 펼친 전술을 엿볼 수 있다.

이미 홍의장군으로 알려진 곽재우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도록 여럿에게 붉은 옷을 입혀 교란전을 썼고, 벌통을 건드리게 하거나 이정표를 바꿔 적을 혼란에 빠뜨렸다. 또 왜군 군선의 예상 경로를 예측하고 적의 물자 공급을 막기 위해 남강에다 통나무를 띄웠다. 징과 북, 꽹과리를 치고 일제히 소리를 지르는 등 엄청난 병력인 양 위장술을 쓰기도 했다.

적진을 흔들고 치고 빠지고 다시 불러내고…. 한 마디로 그는 변화무쌍하고 신출귀몰했다. 요새말로 말하면 게릴라전에 아주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천강 홍의대장군' 깃발을 들고 말을 타고 다닌 것으로 전해진다. '천강'은 말 그대로 엷은 붉은 빛을 말하는데 그가 왜 붉은 옷을 입었는지는 짐작되지 않는다. 다만 대부분 글자를 익히지 않은 의병들에게 그의 이름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지휘관의 표지로 자신을 드러내어 지휘체계를 갖추고 수천 명의 의병을 통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의령읍 의령천변에 있는 충익사(忠翼祠)는 곽재우와 의병(義兵)들을 기리는 주요 유적지이다. 현재 의령군에서는 매년 4월 말에 의병제전을 열고 있다.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곽재우 장군과 17장령을 비롯한 의병들을 추모하는 것이다. 1978년 건립한 충익사 입구에는 의병들을 추모하는 의병탑이 있는데 1972년 건립됐다. 의령군을 상징하는 탑이기도 하다. 동그란 고리를 눕혀서 차곡차곡 쌓은 탑이다. 고리는 전부 열여덟 개인데 의병장 곽재우와 열일곱 장수를 뜻한다.

이곳 충익사에 들어서면 입구 왼쪽으로 충의각이 있다. 의병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집이다. 오방색 단청 빛깔이 고운 충의각은 마치 꽃상여를 형상화한 것 같다. 충의각 안에는 의병 장수 1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의병장 곽재우, 영장 윤탁, 도총 박사제, 수병장 오운, 이운장, 배맹신, 심대승, 독후장 정연, 돌격장 권란, 조군 정질, 전군 허연심, 전향 노순 치병 강언룡, 군기 허자대, 기찰 심기일, 복병 안기종, 군관 조사남, 주몽룡 등이다.

충익사 앞 의병탑. 곽재우와 열일곱 장수, 이름 모를 의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탑이다.

강 가운데 모래톱은 어느 동네 땅?

충익사 앞을 흐르는 의령천은 용덕천으로 이어지고 용덕면 교암리에서 다시 용소천과 만나 소상리 앞 남강으로 합류한다.

"동네터가 사방이 물이 드는 곳이라 무데미라 했제. 도랑둑도 없고 제방도 없던 시절에는 오데 갈라모는 우짜든지 배를 타야했제."

들논에서 만난 월촌아재는 교암리는 뒤만 놔두고 양 옆과 앞 모두 물길이라고 했다.

"요기는 징검다리를 놓을 때에도 그냥 쪼맨헌 바위 갖고는 안되고 장골들이 항꾸내 짊어져야 할 정도로 큰 바위여야 됐다아이가. 그래가꼬는 또 그 위에다 평평한 돌을 올렸제. 큰 물이 들어 징검다리가 떠내려가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다시 다리를 놓고…. 부역이다아이가. 다리가 좀 많았으까. 천지가 물구디니…."

너른 들은 농사가 잘 되는 비옥한 땅이었지만 물난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의령 산자락을 훑어온 샛강들은 남강에서 낙동강으로 남해바다로 이어졌다. 이 강들은 뱃길이 되기도 했다. 용덕천이 남강과 합류하는 곳은 소상리 앞이다. 소상은 강물을 불러들인다는 뜻이다.

용덕천으로 이어지는 정암 강변 둑길 옆 승마체험장. 붉은 옷을 입고 흰 말을 타야 할 것 같다.

지명대로 이곳 소상리는 그야말로 메기가 침만 흘려도 앞마당까지 물이 들었다는 곳이다. 강가 낮은 땅 무듬이들은 제방을 높여 물막이를 단단히 했다. 이제는 지나가다 던져만 놔도 뭐든 잘 자란다는 기름진 땅이다.

이곳 의령군 용덕면 소상리에서 강을 건너면 함안군 법수면 황사리이다. 이곳 돈대나루는 돈대진(遯垈津)이라 할 만큼 제법 큰 나루였다. 남강을 사이에 두고 함안·의령 사람들은 서로 배를 타고 드나들며 논밭을 부쳤다고도 한다. 함안 사람이 이곳에 땅이 있어 건너오기도 하고 의령 사람들이 건너가 경작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정암리 끝 둑길에서 모래톱으로 이어지는 길과 돌다리. 이 다리로 모래톱 밭에 농사 지으러 다니는 트럭과 주민들이 드나들고 있다.

용덕천 건너 정암리 강변둑은 좁은 도로 하나를 두고 강변 풍경이 전혀 다르다. 들판은 하우스로 덮여있는데 정암에서 이어지는 강변 둑길 주변에는 생뚱맞게도 체육시설과 승마체험장 등이 조성돼 있다. 아무래도 붉은 옷을 입고 흰 말을 타야 할 것 같다.

둑길이 끝날 즈음 소상리 무듬이들 앞 강으로 이어지는 제법 너른 모래톱과 습지가 나온다. 양 옆으로 난 두 갈래 물길에 갇힌 섬으로 보인다. 강변 끝자락에서 이곳으로 건너가는 돌다리가 있다. 사람은 살지 않지만 경작지가 있어 시멘트와 돌을 섞어 대충 부어 만들어 그곳으로 농사를 지으러 다니는 사람이나 트럭이 드나들고 있었다.

낙동강을 향해 쏟아질 듯이 흐르는 물 냄새를 맡으며 다리를 건너 들어선 그곳은 또 다른 별천지다. 보리밭이 새파랗게 펼쳐진다. 붉은 흙길이 보드랍게 이어져 모롱이를 돌아가고 있다.

물이 드나드는 곳은 계절보다 웃자란 풀들로 이미 푸른 습지와 늪을 이루고 있어 그 속을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모래톱은 강물을 따라 길게 이어져 의령읍 정암리와 용덕면 소상리, 그리고 함안군 군북면 월촌리 등 3개 행정지역에 걸쳐 있다. 강 건너에서는 군북면 소재지를 흘러온 석교천이 월촌들과 황사들 끝자락을 물고 남강과 합류하며 모래톱 앞에 머문다.

5월 말 무듬이들 둑에서 내려다보는 물빛은 벌써 여름빛이 짙다. 1592년 임진년 정암진 전투가 꼭 이 무렵이다. 강물은 수백 년 전 역사와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동쪽 법수면 이무리나루터 쪽으로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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