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한 달 전이었나. 만 이년만의 감질나는 술자리. 이 년간 임신과 수유로 꼭꼭 눌러두었던 참을 수 없는 욕망의 서슴없는 알코올 탐닉. 그러나 돌아갈 곳이 막다르게 정해진 나는 기껏 단 두 잔의 맥주 흡입으로 막힌 골목이나마 잠시 달려갔다 돌아올 정도의 자유로 만족. 새첩다. 그래도 간만의 술자리는 가능한 한 여러모로 지난 세월을 끄집어내 불현듯 현재의 시간대로 올려놓았다. 과거는 언제나 그렇듯이 현재와 묘하게 차이 나고 무섭도록 반복적이다. 누가 알았을까. 마흔둘이 스물일곱의 청춘과 대작하는 장면을 십육 년의 세월 차를 가운데로 접고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찍어낼 줄이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 옛날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직장이라는 것에 다녔던 낯선 바닷가 찰랑거리는 돛 선 위에서, 갖지 못한 밤바다마다 서러운 '시거리'는 그 특유의 푸른 형광 빛을 파도에 일렁였고, 밤새 마신 술과 쏟아낸 통곡들에 아랑곳없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아침 바다의 무심한 물안개, 그래서 뱉었던 '어쩌란 말이냐, 임은 너처럼 꿈쩍 않는데'란 걸쭉한 고백은 지금 뇌어 봐도 한없이 처연하다. 그래서 내게는 그 안개 같은 희뿌연 기억들이 인정도 없이 사정도 모르고 들이닥친 것이다. 느닷없었다.

그때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서 또 동시에 이것과 저것 아닌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그야말로 스물일곱이라 하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녀.' 내 어설픈 사유와 감각과 마르지 않는 상처와 희망까지도 보듬어주었던 마흔두 살의 검은 뚝섬.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또 갑자기 맺어지는 것은 그다지 긴 시간을 요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눈빛이면 족하다. 십육 년 전 여름 처음 본 날, 검은 낯 위로 반짝이던 진주 목걸이가 제아무리 화려했을지라도, 커다랗게 흔들리던 그녀의 눈에 가득 들어찬 슬픔과 울분 덩이들을 모르게 할 순 없었다. 그녀의 정서는 참으로 강렬해 무시로 비장했고, 솔직한 입술은 앵두보다 붉었다. 웃는 모습이 예뻤지. 그래서 커다란 그녀를 담아내기에 학교라는 공간은 늘 힘에 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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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는 밤이면 밤마다 술을 마셨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드러난 것과 다르게 사실 우린 술을 잘 마셔대는 스타일은 절대 아니었다. 알고 보면 '쌍큼한' 스타일이니까. 그저 술을 마셔대면 웃음이 많아지니까. 단지 술 마시며 얘기하고, 또 술 마시며 울고 노래하는 것이 좋았을 뿐인데. 걱정된다면 함께 있었던 사람들만 살짝 부끄러워해 주면 되는 거였는데. 다시 현재 술자리로 오버랩. 예나 지금이나 젊음과 현실은 악연. 마흔둘 앞, 힘겨운 균열을 견디고 있는 스물일곱. 아, 또 하나의 '그녀'에게 도대체 난 무엇일 수 있을까.

/서은주(양산 범어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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