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21) 구영진 창원시청 육상 감독

좌우명과 함께한 세월이 어느덧 30년이다.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는 늘 '한다면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창원시청 육상부를 이끄는 구영진(48) 감독의 모바일메신저 알림말은 '한다면 한다'다. 그는 좌우명대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단 한 번도 정식 육상부원으로 살아가지 못했지만 육상에 몸담은 순간부터 마음먹기에 따라 결과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한평생을 살아왔다.

그런 그가 지난해 한 차례 아픔을 겪었다. 구 감독이 지휘하는 창원시청은 늘 전국체전에서 웃었지만 지난해 감독 부임 11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체전 노메달을 기록한 탓이다.

구 감독은 "선수들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고 마음을 정리했지만 지도자라는 직업상 성적을 내지 못한 만큼 아쉬움이 큰 한 해였다"고 자평했다.

지난해 '노메달'에 그친 창원시청이지만 올해는 전망이 밝다. 꾸준히 경보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변영준과 함께 구 감독의 주종목인 허들 종목에 첫 선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창원시청 구영진 감독은 지도자로서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를 배출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구 감독은 경상대학교 재학 시절 허들을 주 종목으로 뛰었다. 하지만 실업팀 감독으로는 늘 자신의 주종목 선수가 아닌 다른 종목 선수들을 지도했다. 그럼에도 늘 창원시청이 입상대에 섰던 만큼 올해 전국체전에서는 다시 입상대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김병준은 미국에서 전지훈련 중입니다. 선수들은 자기보다 비슷하거나 더 뛰어난 기량을 유지한 선수와 경쟁을 해야 성장합니다. 그래서 병준이를 미국으로 보냈는데, 보고대로라면 컨디션이 많이 올라왔다고 하네요. 한 해 중 가장 좋은 컨디션으로 출전하는 전국체전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니 올해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드네요."

◇운동에 살고 운동에 죽고 = 학창시절 구 감독은 '운동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운동선수 혹은 체육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꿨던 그는 처음부터 육상선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 그가 지원했던 종목은 야구다. 당시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 야구부에 입단테스트를 받을 때 그는 야구공을 한 번도 잡아보지 않았으나 초등학교 시절 야구를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입단테스트를 했다. 멀리 던지는 게 능사가 아닌 야구였지만 그는 멀리 던지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야구와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후 여러 종목을 지원했지만 늘 결과는 똑같았다. 입단테스트로 끝이었다.

계속된 탈락에도 운동을 너무 하고 싶어하는 모습에 형수님이 움직였다. 형수님은 자신을 데리고 도교육청을 찾아갔고, 거기서 육상이라는 종목과 마주하게 됐다.

"당시 마산운동장에서 경남은행 황정대 감독에게 100m 달리기로 테스트를 받았죠. 달리기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젖먹던 힘을 다해 뛴 뒤 벌러덩 누워버렸어요. 후회 없이 뛰었는데 감독님은 무관심하셨죠. 그래서 또 떨어졌구나 하고 운동은 접고 이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자세만 고치면 되겠다'며 육상을 하자고 말씀하시며 손을 잡아주셨죠."

우여곡절 끝에 육상을 시작한 그는 '1986아시안게임'에 대비해 열린 종별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해 하루 10시간이 넘는 강도 높은 훈련에 임했다. 그러나 구 감독은 선수 등록 날짜를 몰라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늘 운동을 하는 것이 행복했던 그지만 대회 출전 무산이라는 아픔 때문에 운동을 포기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처음 열린 중·고 연맹전에서 그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겠다는 다짐을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선수 등록 날짜에 맞춰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촌놈이 뭘 알겠어요. 형님이랑 함께 서울로 올라가 100m 종목에서 일이 터져버렸죠."

100m 종목에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던 구 감독은 나가야 할 시간에도 자신의 순서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은연 중 잘못됐다는 걸 직감하고 곧장 형님과 경기 뛰게 해달라고 경기 담당자에게 억지(?)를 부렸다. 눈물범벅으로 설명을 하다 형님이 사연을 자세히 전달, 겨우 애초에 없던 8번 트랙에 설 수 있었다.

그런데 예선전, 결선을 통해 100m에서 덜컥 우승을 차지했다. 구 감독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물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그는 그 대회 종합 순위 2위를 차지했다. 높이뛰기 종목에서 조금만 더 성적이 났다면 종합 우승도 가능했다.

이후 경상대를 졸업한 뒤 경남도생활체육회, 구암고 등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파란만장했던 첫 대회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고 고등부 당시 혼성종목을 해봤기 때문에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니라도 충분히 지도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높이뛰기 윤제환·7종 경기 박서희 인상 깊어 = 실업팀에서 지도한 선수 중 그의 머릿속에 가장 크게 자리 잡은 제자는 높이뛰기 종목의 윤제환과 7종 종목 박서희다.

구 감독은 "서희는 구암고 감독으로 부임하고 받은 첫 제자로 국내 여자 7종 경기의 1인자로 자리매김했었다. 하지만 부상에도 불구하고 전국대회 출전을 감행하다 부상이 악화됐다. 선생으로서 너무 미안하다"고 밝혔다.

김해가야고, 한국체대를 거친 윤제환은 실업팀 입단 당시만 해도 오갈 데 없는 선수였다. 하지만 지역 출신 선수라 구 감독은 영입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윤제환과 한 차례 면담 후 곧장 계약을 추진했다. 그것도 선수가 원했던 연봉 그대로를 보전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구 감독은 "제환이와 한 차례 면담 후 이 선수는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당시 라이벌 모두의 장·단점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고, 자기가 어떤 훈련을 임한다면 더 기량이 발전할 수 있다는 분석을 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정말 기쁜 마음으로 계약을 매듭지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구 감독의 판단은 정확했다. 윤제환은 2011년 6월 2m 16㎝를 기록,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티켓을 따냈다.

두 선수에 대해 구 감독은 "지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선수들이고, 하나를 알려주면 습득력이 빠른 친구들이었다. 지도자는 길을 알려주고 선수는 그 길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데 두 선수는 이 부분에서 상당히 인상 깊은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실업팀 감독으로 11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구 감독에게는 지도자로서 아직 못 이룬 꿈이 있다. 올림픽 출전 선수 발굴과 한국신기록을 깨는 것이다.

"감독으로 이뤄낼 수 있을지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다면 한다'는 마음가짐이라면 꼭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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