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11) 남해지역 3·1 운동

한려수도를 낀 빼어난 바다 풍광과 기암괴석으로 뒤덮여 산세가 수려한 금산.

팔만대장경 판각지이자 유배 문학의 산실. 충무공 이순신이 생을 마감한 가슴 시린 땅. 유자, 마늘, 시금치 같은 대한민국 대표 먹거리 산지. 깎아지른 해안 산비탈에 다랭이 논을 짓고 죽방렴으로 고기를 잡으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는 곳.

이렇듯 남해는 '보물섬'이란 수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자연과 맛, 인간과 역사가 어우러진 공존·공생 집합체다.

척박한 토양, 섬이라는 지리적 역경과 끊임없이 마주하고 이를 이겨 낸 이곳 사람들에게 '일제 강점'이라는 역사적 고난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1919년 3월 1일 전국을 뒤덮은 항일독립만세 물결이 남해에 도달한 것은 한 달여 뒤인 4월 초였다.

◇설천에서 발현한 독립만세 기운 = 차를 타고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진교 나들목으로 빠져나와 다시 해안 절경을 곁에 두고 달리기를 20여 분. 40년 관문 남해대교를 건너자마자 딛게 되는 땅이 설천이다. 아름다운 해안 절경과 드라이브 코스가 일품인 이곳은 96년 전 3·1독립만세 메아리를 남해군 전역에 봉화처럼 전파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3월 중순 하동 전역을 한바탕 휩쓸고 간 항일독립만세 열풍이 4월 2일 이곳 설천에 닿았다. 남양리에 살던 이예모(李禮模·당시 38세) 선생은 이웃한 하동에 갔다가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집에 돌아왔다. 이 선생은 정순조(鄭順祚·당시 32세), 정몽호(鄭夢虎·당시 22세), 윤주순(尹柱舜·당시 24세) 선생 등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독립선언서를 내보이며 함께 만세운동에 나설 것을 권유했다. 이들은 의거에 동참하기로 뜻을 모으고 일대 마을을 돌아다니며 동지를 규합하고 서당 학생들에게도 연락했다. 이튿날 오후 3시. 남양, 금음, 문항 등에서 규합한 설천면민들이 모두 남양리 노상에 집결했다. 군중 앞에 이예모 선생이 나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정순조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남해읍을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시위 군중은 저마다 장대에 높이 매단 태극기를 펄럭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설천면 남양에서 출발한 행렬이 문항, 진목, 비란을 지나 고현면 도마, 이어에 이르자 이곳 면장인 김치관이 놀라 경찰 주재소에 밀고를 한다. 날이 어두워질 때쯤 시위 군중은 이 사실을 알고서 다음날을 기약하며 일단 해산한다.

남해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정임춘 선생의 묘.

◇남해읍으로 들물처럼 번진 만세소리 = 이튿날 전날 시위에 힘을 얻은 참가자들은 인근 지역에서 더 많은 이들을 규합해 남해읍 장터로 발걸음 옮기기 시작했다. 전날 만세시위 군중 위세를 목격한 경찰은 읍으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하고 나섰으나 모여드는 군중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다. 시위대 중 일부는 이날이 장날임을 이용해 장꾼으로 위장해 장터로 향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오후 1시 남해읍 장터에는 시위 군중 10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예모 선생 등 중심인물 16명은 미리 약속한 계획에 따라 신호에 맞춰 일제히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 중 정흥조(鄭興祚)와 정임춘(鄭任春) 선생 등 10여 명은 사람들을 지휘해 군청과 공립보통학교, 우편국, 경찰 주재소까지 뛰어들어가 순사들을 내동댕이치고 유치장에 억울하게 갇힌 이들에 대한 석방을 요구했다. 또한 남해군수와 순사, 금융조합 조합장도 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도록 했다. 성난 파도와 같은 시위 군중의 힘을 이기지 못한 경찰은 결국 발포를 해 이를 진압하기 이른다. 일본 경찰은 군중이 흩어지는 틈을 타 주동 인물 9명을 검거한다. 남해주재소는 이튿날 군대에 출동을 요청해 시위 참여자들을 잡아들였는데 23명이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때 시위를 주동한 이예모·정순조·정학순(鄭學淳)·윤주순 선생 등은 1~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대구와 진주 등 형무소에서 실형을 살았다.

◇사그라지지 않은 항일만세의 기운 =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6일. 고현면 포상리 천동마을에서 이 일대 주민 700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오후 3시께 포상리 산 위에 모인 주민들은 만세를 외치며 다시금 남해 장터를 향해 행진했다. 소식을 들은 경찰은 총검으로 위협하며 제지하려 했으나 시위대는 굴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진격에 겁을 먹은 경찰은 다시금 발포를 통한 강제해산에 나서 시위를 진압했는데 이 과정에서 시위 군중 1명이 즉사하는 비극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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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옛 남해읍 장터 3·1 항일독립 만세 시위지 전경, 설천면 남양리 3·1 항일독립 만세 시위지, 문항리에 있는 남해 3·1운동 발상 기념탑, 남해읍 남산 기슭에 자리한 남해 3·1독립운동기념비. /김두천 기자

◇앞서나간 기억 의식 아쉬운 현장성 =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정학교 등 17인 결정문'(1919년 7월 15일)과 남양리 주민들 증언을 토대로 시위 군중이 모인 장소를 설천면사무소 앞 설천초등학교와 중학교 사이임을 확인했다. 시위 장소는 지금도 설천면 행정, 교육의 중심 기능을 하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남해장터 시위지를 19세기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남해읍성 고지도를 통해 특정했는데 옛 객사 터에 자리 잡은 현 남해읍사무소 앞이 잡종지 지목 시장 터임을 확인했다. <동아일보> 1934년 2월 9일 자 기사를 통해 이곳에 있던 시장이 현 남해전통시장 자리로 이전한 것도 알아냈다.

연구소는 그러나 이들 역사 현장에 자리에 간략한 표지가 없다는 사실이 아쉬움을 지적한다. 남해군은 일찍이 3·1운동을 기억하고자 1968년 남해읍 남산 기슭에 남해 3·1독립운동기념비를, 1985년에는 남양에서 모인 시위대가 읍으로 향하던 길목인 문항리에 남해 3·1운동 발상 기념탑을 세웠다. 기념탑은 지난 2007년 높이 11m 화강암 마천석에 새김을 해 재정비했다. 기념탑을 등지고 왼편 길 안섶에는 남해 항일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한 정순조, 정임춘 선생 묘가 있다.

남해 3·1운동 발상 기념탑은 시위대가 읍을 향해 행진하던 길목에 있고 인근에 참여자 묘가 함께 있다는 점에서 역사성과 장소성을 잘 나타낸다. 반면 남해 3·1독립운동기념비는 현장과는 다소 멀리 떨어진 사람들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산기슭 수십 여개 계단 위에 성역화하다 보니 역사를 기억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는 것이다.

옛 남해읍장터 만세시위지 주변에는 남해가 팔만대장경 판각지임을 그림을 새긴 조형 의자와 조선 숙종·경종 때 남해로 유배 온 노론의 거두 소재 이이명 선생을 소개하는 표지를 세워져 있다. 남해군청 들머리에 있는 한 건물 앞에는 1945년 주둔한 미군이 판 우물 터를 성역화 한 곳도 있다. 이들 역사 역시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선조들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위해 피땀을 흘린 항일역사가 살아숨쉬는 바로 그 역사 현장 중심에 관련 표지가 부재한 것은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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