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농을 찾아서] (92) 사천 상아농장 안후상 대표

전기가 흐르는 철책 앞에서 신발 바닥을 소독하고 농장에 들어서자 염소들이 먼저 반긴다. 안후상(60)·최정아(58) 부부가 운영하는 사천시 곤양면 가화길 109 상아농장이다. 이삿짐을 옮기는지 안 대표는 바쁘다. 트랙터에 한가득 짐이 실렸다. 트랙터를 따라 농장 언덕 위로 오르는데 우리 뒤로 염소들도 천천히 따라온다.

"잠시만 기다리면 됩니다. 이곳이 우리 농장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입니다." 안 대표가 사방이 탁 트인 농장 꼭대기에 트랙터를 세우더니 짐을 내린다. 그런데 이삿짐이 아니다. 야외 인터뷰를 위해 안 대표가 준비한 테이블과 의자다. 참 역동적인 인터뷰가 될 것 같다.

◇가족 반대 무릅쓴 축산학도의 길 = 농장이 꽤 넓어 보인다. 농장이 아니라 마치 야산에 온 느낌이다. "7만㎡(2만 1000여 평)쯤 됩니다. 염소를 방목해 키우는데 현재 1000마리 정도 됩니다."

진주가 고향인 안 대표는 어릴 때부터 가축을 기르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하다 하다 안 되면 농사짓는다'는 의식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가족의 반대는 당연했다. 안 대표는 "가족들은 사범대를 원했는데 나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가축 기르겠다고 우겨 경상대학교 축산학과를 입학했습니다."

1982년 8월에 졸업한 안 대표는 나름 괜찮은 곳에 취직했다. 농촌진흥청 대관령 고랭지시험장에서 보조원으로 1년 6개월 정도 일했다. 하지만 임시직이라 대학원을 나오면 연구사로 특채하겠다고 했지만 대학원에 다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만두고 축협이 운영하는 서산 한우개량사업소에서 1년 6개월 정도 근무했다. 이후 경기도 소래에 있는 종근당목장에서 목장장으로 2년 정도 일했다.

"졸업 후 몇 년간 타지를 돌다 보니 내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천시 곤양에서 인공수정소를 개업했습니다. 서산 한우개량사업소에서 쌓은 노하우 덕에 돈을 제법 벌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병치레로 3년을 보내면서 다 까먹었습니다."

가벼운 식중독에 걸려 치료하지 않고 있었는데 급성 신장염에다 C형 간염이 왔단다. 이후 생사의 갈림길에 들어설 만큼 몸 상태가 나빴다. 다행히 3년을 견디니 건강은 되찾았지만 그동안 번 돈은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내 땅, 내 농장 = 다시 일어서야 했다. 이젠 축산을 하고 싶었다. 내 땅에 말뚝을 박아야 한다고 마음먹고 통 빚을 냈다. 땅 5000평을 사고, 축사 시설비 3500만 원에 5800만 원을 들여 젖소 20마리를 입식했다. 93년 6월 말, 상아농장의 시작이었다.

"그땐 재미가 있었습니다. 5000평이던 농장을 조금씩 넓혀 2만 1000평으로 확장했죠. 98년입니다. 젖소도 300마리로 늘었고요. 10년 동안 젖소를 키웠는데 적게 벌었다는 소리는 안 들었죠."

그런 그가 10년 만인 2003년 낙농업을 접었다. 왜 그랬을까? "그 무렵 전국적으로 우유가 남아돌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정부가 낙농 쿼터제로 폐업정책을 펴더군요. 돈벌이는 됐지만 누군가 그만둬야 한다는 분위기라 내가 먼저 접었습니다." 안 대표가 웃으며 남 이야기하듯 말한다.

상아농장 안후상(왼쪽)·최정아(가운데) 부부가 도농기원 강소농지원단 류재숙 축산전문가와 함께 염소 생육상태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

◇젖소에서 한우로, 그리고 사업 실패 = 이번엔 한우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젖소와 달리 어려운 점이 있었다. 낙농업은 원유를 가져가 판로 걱정은 안 했다. 하지만 한우는 직접 팔아야 했다. 유통에 관여해야만 소득이 생겼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기도 했다.

"궁리 끝에 진주에 한우식육식당을 열었습니다. 직접 기른 소를 도축해 조달하면 많은 손님이 찾을 것이라 여겼죠. 유치가 한두 개 남은 생후 60개월 정도 된 암소를 썼는데 최상급이었습니다. 손님 중에는 우리 한우를 알아본 사람도 있었지만 잘 안됐습니다. 한마디로 손님 유치를 못 한 거죠."

손해가 막심했다. 가게를 정리하는 데만 3년이 걸렸다. 키우던 한우 100마리를 모두 팔고도 빚이 남아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단다. "당시 소 가격이 마리당 500만~600만 원 정도 했습니다. 솟값만 5억 원이 넘었는데 빚 갚느라 다 털었습니다. 그래도 다 못 갚았으니 야반도주 안 한 게 다행일 정도였죠."

◇원점서 다시 시작, 이번엔 염소다 = 2007년 염소를 키웠다. 다시 원점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염소들이 한꺼번에 새끼를 낳는 탓에 새끼를 많이 잃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젠 나름 노하우가 생겼다.

그로부터 8년, 그동안 염소를 꾸준히 늘려 작년 말 1000마리로 불렸다. 이 중 새끼를 낳는 암놈이 500마리 정도 된다.

매출이 궁금했다. 안 대표는 "작년엔 1억 2000만 원 정도 했습니다. 올해는 염소가 늘어 2억 원을 예상합니다. 매출 중 절반은 염소가 먹고, 나머지 절반은 내 수익인데 순수익 개념으로 보면 40% 정도 될 겁니다."

방목을 하는데도 매출의 절반을 염소가 먹는다니 쉽게 이해가 안 된다. 안 대표는 "풀이 아무리 좋아도 풀만 먹여선 안 됩니다. 형편이 어려워 마늘 껍질을 가져와 쌀겨와 함께 먹이고, 방목해 풀을 뜯게 했는데 1년에 새끼 한 번 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터득했죠. '아 사료를 아껴선 안 되는 거구나'하고요. 하루에 배합사료를 500㎏ 정도 먹습니다. 이렇게 먹이면 2년에 세 번 정도 새끼를 낳죠."

안 대표는 염소 사육이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든 가축이든 애정을 줘야 합니다. 동물이라도 싫은 내색을 하거나 때리기라도 하면 발육상태가 떨어집니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감정이 있어 짜증을 내면 금방 알아채죠." 염소 사육 8년 동안 터득한 노하우다.

그래서일까 농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유달리 과한 염소들의 인사(?)에 당황하기까지 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수시로 찾아와 옆에 머물다 돌아가곤 했다.

"염소는 젖꼭지가 두 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새끼를 한 마리 낳으면 서운하고, 두 마리가 딱 맞다고 하죠. 세 마리면 한 마리가 처지고, 네 마리면 새끼들 다 죽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 1월 어미 염소 한 마리가 새끼 네 마리를 낳았습니다. 두 마리는 어미에게 두고 두 마리는 우리 부부가 키웠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는 금방 죽고, 나머지도 성장이 멈춘 듯 자라지 않더군요. 강제로 어미에게서 뗀 것이 안타까워 정성껏 키웠더니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더군요." 안 대표의 염소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이야기였다.

축산농의 길로 들어선 지 20여 년, 안 대표에게 축산은 어떤 의미일까?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제일 행복하잖습니까? 나는 보람 있는 인생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나처럼 맨주먹으로 축산업에 뛰어든다면 말리고 싶습니다. 힘든 과정을 아주 잘 아니까요."

안 대표는 요즘 흑염소 가공·유통분야에 관심이 많다. 친환경적으로 방목해 기른 염소임을 알도록 해 누가 봐도 저렇게 키운 염소라면 한번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겠단다. 그러려면 염소를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힘닿는 데까지 계속 염소를 키울 겁니다. 힘에 부치면 규모를 줄이면 됩니다. 그리고 이번엔 가공·유통 분야에서도 반드시 성공하고 싶습니다."

<추천 이유>

◇경남도농업기술원 강소농지원단 축산전문가 류재숙 = 상아농장 안후상 대표는 경상대학교 축산학과를 졸업한 후 낙농 10년, 한우 5년에 이어 흑염소를 2007년부터 사육하면서 친환경적인 흑염소 방사 사육과 사룟값 절감을 위해 마늘부산물 등을 먹여 소득을 창출하는 대표적인 강소농입니다. 그는 수입 양고기에 대응하고자 HACCP 인증과 친환경 흑염소 고기 생산방법이 탁월해 타 농장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의 저지방 고기 선호, 기성세대의 보신용 등 소비자 수요가 맞물려 흑염소 사육에 따른 부가가치 창출이 날로 늘어날 것을 확신하면서 흑염소 사육 1인자를 꿈꾸는 진정한 축산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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