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사람]박환희 무용예술단 단장

"엄마."

누구는 쉽게 부를 수 있지만 누군가는 부르고 싶어도 부르지 못한다. 엄마라는 단어만 봐도, 들려도 울컥한다. 가슴이 저리다. 엄마가 딸에게 해주는 일상적인 것을 경험하지 못한 탓에 어렸을 땐 그저 어르신이 따뜻하게 대해주기만 해도 좋았다.

엄마를 잃은 건 박환희(57·한국무용가) 씨가 세 살 때였다. 태어난 곳은 의령이지만 가정 형편상 친척 집에 얹혀 살아 진주, 삼천포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박환희 무용예술단 단장인 박 씨가 10여 년 전부터 어르신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온 건 엄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우선 '엄마', '어머니'라는 단어를 마음껏 부를 수 있었다. 어르신에게 춤을 가르쳐 주거나 공연을 하면 마음이 뿌듯했다. 행복했다.

춤에 빠진 건 본능이었다. 어렸을 때 <전설의 고향>(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는 구슬픈 음악에 몸이 절로 움직였다. 어려서부터 춤을 곧잘 췄다. 아프다가도 춤을 추면 나았고 춤을 추지 않으면 아팠다.

"제가 5~6살 때 올케언니가 시집을 왔어요. 비단을 많이 해 왔죠. 한 날은 그걸 꺼내서 입고 밤이 새도록 춤을 췄어요. 다음 날 아침 올케언니가 방에 들어왔는데 '도둑이 들어와 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놨다'면서 '환희가 없어졌다'고 소리쳤어요. 저는 비단 속에 파묻혀 자고 있었는데 말이죠."(웃음)

박환희 무용예술단 단장.

박 씨는 부산의 춤 명인 김진홍(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4호 동래한량춤 보유자) 선생에게서 춤을 배웠다. 또한 엄옥자 전 부산대 교수(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 보유자)에게서도 춤을 배웠다.

대학에서 무용학을 전공한 것은 50대 초반. 늦은 나이에 대학의 문을 두드리게 된 데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힘이 컸다.

"시어머니를 엄마처럼 생각했어요. 엄마의 정이 뭔지 잘 알지 못했기에 시어머니가 주신 사랑이 마냥 좋았습니다. 무뚝뚝했지만 속이 깊으셨습니다. 학교 다닌다고 했을 때 '결석하면 안 된다, 열심히 다녀라'고 많이 격려해 줬어요. 남편도 적극적으로 밀어줬습니다."

30살 정도 차이 나는 동기들과 같이 학교를 다니는 건 쉬운 게 아니었다.

특히 대학교 1학년 때는 여러모로 힘들었다. 적응하기도 어려운 시기에 시어머니까지 편찮으시면서 똥오줌을 받아내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처럼 생각했던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은 그 이후부터였다.

지금은 한 달에 한 번꼴로 경남종합사회복지관, 마산시니어카운티, 밀양 좋은연인요양병원, 김해보훈요양원을 방문해 무료로 공연을 한다. 김해고등학교 교사인 남편(신봉균)도 아내에게 춤을 배운 뒤부터 함께한다.

"부부가 같이 무대에 오르니까 남들은 부러운가 봐요. 근데 사실은 불편하기도 해요. (웃음) 공연할 땐 서로에게 더 엄격해지거든요.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보람된 일도 많습니다. 7~8년 전 대방동 실버학교에서 어르신에게 춤을 가르쳤을 때였어요. 여든쯤 된 할머니가 걸음도 옳게 못 걸을 정도로 몸이 안 좋았어요. 근데 살풀이 수건만 하나 들고 있는데도 멋이 나는 거 있죠? 주위에선 걸음도 못 걷는데 웬 춤이냐면서 윽박지르기도 했지만 그 할머니의 몸짓에는 연륜과 슬픔, 고난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같이 살풀이춤을 배웠던 할머니들이 콩쿠르에 나가 상을 받았는데 아주 행복해하셨어요."

박환희 무용예술단은 다른 무용단과 달리 봉사활동을 조건으로 단원을 모집한다. 대신 수업료가 저렴하며 작품비가 없다. 그래서 단원들의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박 씨는 행복하다. 춤을 출 때 팔만 살짝 들어도, 어깨를 움찔해도 좋다. 봉사활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춤에 대해 후회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한때 갱년기로 우울증을 앓았던 적이 있습니다. 남편은 여름방학 때 지인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고 저는 콩쿠르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그땐 정말 힘들었어요. 눈물을 흘리면서 연습을 했습니다. 근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춤을 추지 않았다면 갱년기를 어떻게 보냈을까. 아무리 힘들어도 춤을 출 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봉사활동을 할 때도."

박 단장은 자신이 춤을 출 수 있는 한 계속해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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