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따라 내 맘대로 여행] (57) 광주 5·18 자유공원, 국립 5·18 민주묘지

햇살은 온기를 잔뜩 머금었다. 이제 막 움튼 연초록 세상은 참으로 싱그럽다. 계절의 여왕은 보란듯이 그 위엄을 뽐내고 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 날을 지나면서 새삼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나날이다. 소소한 일상이 감사한 계절이기도 하다.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찬란한 5월, 광주를 찾았다.

발길이 멈춘 곳은 복잡한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5·18 자유공원(광주광역시 서구 상무평화로 13)이다.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정권 찬탈을 기도하던 정치군인들의 강경 진압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싸우던 이들이 구금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던 곳이다. 원래 위치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이 원형인데, 이곳에 복원, 재현됐다.

당시를 재현한 5·18 자유공원 상무대 시설보존지역.

크게 상무대와 자유관으로 나뉘는데 상무대는 곳곳에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민주주의를 외친 무고한 시민들을 강제로 연행하고, 고문했던 모습들을 그저 눈과 귀로만 보고 있을 뿐인데도 숙연해지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 등 연행된 사람들을 수사하고 재판을 지휘했던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특별수사반이 있던 헌병대 본부 사무실. 경쟁적으로 악랄한 고문을 자행해 신군부에 충성경쟁을 벌였던 인권의 무덤이었던 이곳을 지나면 헌병들이 일상생활을 했던 내무반이 나온다. 당시 시민군 등 연행된 인사가 너무 많아 임시로 심문실과 고문실로 사용됐다고 했는데 이곳에서도 참담한 고문이 자행됐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구금되었던 곳으로, 6개의 감방이 부채꼴로 배치돼 수감자들을 한눈에 감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영창. 지금은 형태만 남아 텅 비어 있는데도 들어서는 순간 서늘한 기운이 엄습해온다.

5·18 군사재판을 위해 지어진 법정은 당시 짜인 각본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게 사형과 무기징역 등 실형을 선고했던 곳이다.

국립5·18민주묘지 제1묘역. 5월을 맞아 찾아온 추모객들이 많다.

자유관은 박정희 군사정권부터 전두환 군사정권, 그리고 5·18 민주화 운동까지 모습을 영상과 자료를 통해 정리해 놓았다.

국립 5·18 민주묘지(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 200)는 5·18 자유공원에서 15분 남짓 차로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다.

오 월 영령을 만나려고 민주의 문으로 들어섰다. 신성한 장소로 건너간다는 의미의 명당수를 지나 추념문 앞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흑백사진과 영상 속에서 탱크가 지나가고 총성과 매운 최루탄이 뒤범벅됐던 금남로. 그곳엔 민주주의를 외치며 피 흘렸던 무고한 시민이 있었다. 자식을, 부모를, 친구를 잃은 산 자의 오열과 분노와 한숨이 있다.

5·18 자유공원 자유관에 보관된 관련 자료들.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는 5·18 추모관.

"일본군이겠지."

시민에게 총구를 겨누고 고문을 자행했던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은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8살 아이가 한참 생각 끝에 질문처럼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을 왜 이렇게 해. 일본군이야."

이 아이에게 그날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오 월이 가고 있다.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는 5·18민중항쟁추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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