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 (2) 전북 고창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와 경남도민일보가 함께 진행하는 '2015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은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지원하고 있다. 습지를 비롯한 생태자연의 아름다움과 생태자연이 사람에게 끼치는 바람직한 영향을 몸으로 누리는 한편 지역사회에도 나름 알리는 일을 하자는 취지로 4년째 진행하고 있다.

5월 6일 떠난 올해 두 번째 생태역사기행은 전북 고창으로 향했다. 2003년 우리나라 제1호로 학원(鶴苑)관광농원이 일궈낸 경관농업이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 일대에 있기 때문이다. 봄이면 청보리, 여름이면 해바라기, 가을이면 메밀을 심어 농사도 알차게 지으면서 그 꽃과 잎사귀가 만들어내는 멋진 풍경까지 즐기게 하는 것이다. 올해로 12회째 되는 청보리밭축제는 4월 18일 시작해 5월 10일 끝났다.

고창에는 또 선운사가 있다. 오래된 천연기념물 동백숲이 이 오래된 절간을 감싸고 있다. 게다가 건물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있는 '자연스러움'도 보통 미덕은 아니고 선운천이 흘러내리는 둘레 풍경도 빼어나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축대가 대표하는 소박함 또한 놓칠 수 없는 매력이라 하겠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아침 8시 창원 만남의 광장을 출발해 11시 20분 조금 못 미쳐 선운사 들머리에 닿았다. 개울을 끼고 오르는 진입로는 여름철 피어나는 꽃무릇과 가을철 물드는 단풍으로 이름나 있다. 8월에 잎이 지고 나서야 붉게 꽃이 피기 시작하는 꽃무릇은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서로 그리워만 한다 해서 상사화(相思花)라 한다. 여기 단풍나무는 가을을 맞으면 흐르는 냇물에 되비치면서 이름값을 한껏 드높인다.

나무를 원래 생김 그대로 써서 지은 관음전을 둘러보는 사람들. /임홍길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 부이사장

하지만 그런 것 없는 봄철에 갔어도 진입로는 좋았다. 미나리냉이 하얀 꽃, 애기똥풀 노란 꽃, 개불알풀 자주 꽃 등등이 곳곳에 피어 있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새롭게 돋아나 푸른 빛을 더해가는 단풍나무들도 잎사귀 싱싱함이 멋졌던 것이다.

자연 속에 들앉은 선운사의 '자연스러움'은 대웅보전 맞은편 널찍한 만세루가 대표하지만 대웅보전 오른편 관음전도 뒤지지는 않는다. 오래되지는 않았어도 세로로 세운 기둥은 물론 가로로 걸친 목재조차 인공을 더하지 않은 채 구불구불한 원래 몸매 그대로다. 게다가 불전이 아니라 여염 살림집처럼 들마루를 내어 임의롭게 아무나 엉덩이를 걸칠 수도 있게 했다. 이름은 관음전이지만 안에 모신 주불이 지장보살(관음보살은 요즘 들어 탱화로 모셨음)인 점도 색다르다.

만세루에서 느긋하게 앉아 차 한 잔을 즐기는 사람들.

좌우로 넓고 앞뒤로 좁아 느낌이 한결 여유로운 대웅보전은 자연석 축대 위에 있다. 더없는 지혜를 뜻하는 비로자나불이 주불이고 좌우협시는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약사불과 죽은 이를 서방정토로 이끌어주는 아미타불이 맡았다. 1633년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40년이 채 안 된 시점에 조성된 불상임을 떠올리면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신 뜻이 좀더 간절하게 다가온다. 엄청난 전란으로 죽거나 다친 일반 백성들을 위했던 것이다.

대웅보전과 육층석탑.

일행은 대웅보전과 관음전을 지나 팔상전과 산신각까지 둘러보면서 그 자연스러움을 눈과 카메라에 담느라 바쁘다. 몇몇은 기둥이나 가로로 쓰인 목재들을 손으로 쓰다듬어 본다. 뒤편에 우거진 동백숲은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어 그 꽃그늘에 들어가 보는 호사는 이제는 누리지 못하는 옛날 일이 됐다. 하지만 그래도 곳곳에 송이송이 매달린 붉은 꽃잎은 멀리서 봐도 선연하다.

이어서 강당 건물인 만세루에 올라 차탁을 앞에 두고 앉으니 어디서 보살이 한 사람 나타나 차를 권한다. 선운사 자생 차나무에서 딴 찻잎으로 만들었다는데 향기가 독특하고 또 짙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한 모금씩 머금고 심신이 흐뭇해져 있는데 같은 일행이 또 어디서 흰떡을 상자째 얻어와서는 나누기 시작한다. 다들 웃음을 한 입씩 베어무는데 누가 한 마디 거든다. "아따, 누가 보시를 오지게 한 모양이구먼!" 만세루 트여 있는 앞뒤로 시원한 바람이 소리없이 흐른다.

절간 들머리 빛고을식당에서 마주한 청국장 비빔밥은 아주 맛깔스러웠다. 배부르게 먹고는 30분가량 걸려 청보리밭 축제장으로 옮겨갔다. 보리를 심는 밭은 물을 담지 않는다는 점에서 벼를 기르는 논과 다르다. 물을 담는 논은 평평해야 하지만 밭은 제 멋대로 울퉁불퉁해도 그만이다. 축제장으로 마련된 고창 청보리밭이 그랬다. 높은 데는 높고 낮은 데는 낮았다. 황토가 뒤덮은 언덕배기에서 그대로 자라나는 청보리였다. 높고 낮음이 있고 튀어나오고 들어가는 입체감이 있어서 밋밋하지 않고 다채로움이 있었다.

사람들은 청보리밭으로 흩어져 들어갔다. 사방이 온통 푸른 보리는 이제 막 이삭이 팼고 틈틈이 자리 잡은 유채에는 조금씩 지고 있는 꽃이 노랗게 매달렸다. 두 갈래 탐방 루트를 따라 걷던 이들이 노란빛과 푸른색이 어우러지는 데를 골라 단체로 또는 혼자서 사진을 찍는다. 셀카봉을 높이 쳐든 사람도 있고 예술 사진을 찍듯 여러 각도 맞춰가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축도 있다.

바람에 일렁이는 청보리와 사진을 찍는 사람들.

걸음은 다들 느긋하고 표정 또한 한껏 여유롭다. 보리밭 사잇길을 가르며 둘씩 셋씩 짝지어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이들도 있고 군데군데 마련된 긴의자에 앉아 양산을 활짝 펴 햇살을 가리고는 서로 어깨를 기댄 채로 나지막하게 노래를 흥얼대는 이들도 있다. 노란 양산을 배경으로 삼아 예복을 입은 채 결혼 사진을 찍는 남녀 한 쌍은 꽤 많이 눈길을 끌었다. 청보리밭 한가운데를 이리저리 거닐고 뽕나무 감나무 따위를 지나면 작은 연못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사람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풍경을 감상하거나 사진을 찍었다. 10년 전 15년 전에 경관농업의 가치를 남먼저 알아보고 푸른색 여울지는 청보리밭을 가꾼 이 지역 사람들이 고마운 것이다.

이런 가운데 몇몇은 다시 가게로 스며든다. 동네에서 빚어낸다는 동동주가 파전·두부와 함께 나왔다. 동동주는 특별하지 않았고 파전은 여느 지역에서도 쉽사리 맛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두부는 손맛이 남달랐다. 지역에서 거둔 두부를 지역 사람들이 만들었다는데, 간간한 맛이 조금 센 듯하면서도 살이 부드럽고 씹는 맛이 고소했던 것이다. 지형에 알맞게 작물을 기르는 농업이 남부럽지 않은 경관을 창출했고 그 경관은 다시 주민들에게 이렇게 수익을 안기는 것이다. 오후 3시 30분, 경남에도 이처럼 경관과 농업과 수익이 공존하는 그런 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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