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10) 거제 일제통치·탄압기구

해방 70년을 맞은 역사적인 해. 파렴치한 일본이 전례 없는 역사 도발로 국민 정서를 분노케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현장을 포함한 일본 산업시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나선 것이다.

일본이 등재하려는 산업시설은 모두 23곳으로 이 중 7곳이 조선인 강제 동원에 관련돼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 나가사키 항 앞바다에 있는 하시마 탄광(일명 군함도)과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가사키 조선소가 꼽힌다. 하시마 탄광에서는 조선인 징용자 500여 명이, 나가사키 조선소에서는 조선인 노무자 4700여 명이 일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이 한국과 한국인에 가한 군사제국주의적 만행이 비단 이뿐만 아니라는 점을 우리 국민은 잘 알고 있다. 이 흔적이 우리 땅 곳곳에 남아있기도 하다. 일본은 한일강제병탄 전부터 반도 지형 특성을 이용해 우리 해안을 군사기지 또는 요새화했다. 어업 수탈을 위한 전진 기지를 구축하기도 했다. 이 같은 군사제국주의 일본의 한국 침탈 주요상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비운의 섬' 거제도다.

◇천혜의 자연요새 송진포 = 잔잔한 바다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해안에 흔한 파도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이름만 바다지 호수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해무가 낮게 깔리는 날이면 바다에 뜬 그 무엇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렵다. 외해로부터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군항이 들어서기 좋은 천혜 자연조건을 가진 진해만. 그 안에서도 칠천도를 앞에 두고 거제 섬 안쪽 작은 내만을 이뤄 깊숙이 몸을 숨긴 이곳 송진포는 수심이 깊고 잔잔해 적함으로부터 은폐, 엄폐가 용이한 함대 훈련과 대기에 최적 장소였다.

청일전쟁 승리 이후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내주게 된 일본은 이후 복수의 칼날을 갈며 군사력 증강에 온힘을 쏟았다. 일본은 특히 영국과 손잡고 해군력을 종전의 4배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러시아도 마산포 연안 측량, 용암포 무단 점령 등 한반도 지배를 둘러싸고 일본과 사사건건 부딪쳤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기지가 있던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 칠천도를 앞에 둔 데다 수심이 깊고 잔잔해 함대를 숨길 군사적 요새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췄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이 과정 속에 일본은 1903년 12월 해군작전계획 요령을 세우고 진해만 송진포 일대에 임시근거지를 구축하기로 한다. 방비대 준비원을 선발해 무기, 식량, 옷 등 물품 확보에 나서는 한편 일본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전신선 구축을 이듬해 2월 10일 마무리한다. 이후 8월 11일 송진포리 일대를 정식 해군용지로 편입했다.

진해만은 대륙에서 러시아와 일전을 벌일 때 병력, 식량, 탄약 수송을 위한 관문인 대한해협 장악에 필수적인 지리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대한해협이 뤼순과 블라디보스토크로 나누어진 러시아 군항을 연결하는 최단항로인 점에서 이곳 감시를 위한 군사거점이기도 했다. 일본이 러일전쟁 이전부터 군사기지를 만들고 개전 이후 이곳을 가장 먼저 점령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은 이를 바탕으로 송진포에 진해만 임시근거지 방비대 사령부, 해군 병사, 병원, 화약고, 해군용 통신소 등을 설치했다. 또한 마산헌병대 송진포파견소를 세우고, 마산주재 영사관으로부터 순사를 파견했으며 일본인 수신감독소, 송진소학교 등이 세워졌다. 당시 병력만 3000명, 일본인 거류민까지 포함하면 모두 3500명이 이곳에 머물렀다. 송진포 일본해군기지는 1912년 4월 18일 이전 전까지 12년 동안 존속했다. 그 뒤에는 경술국치를 전후로 일본이 무단점유하기에 이르렀다.

김의부 거제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은 "전신선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생긴 송진포 우체국은 그 규모가 매우 컸다"면서 "일본은 이곳에 들면서 유곽촌도 만들었는데 이를 보면 근대적 의미에서 성을 사고파는 행위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전해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로 말미암은 주민 피해도 극심했다. 일본의 토지강제수용으로 주민들은 대대로 물려 내려오던 땅과 집, 조상 묘소를 두고 강제이주를 당했다. 김 소장 말대로 일본인 노동자들이 매춘과 도박을 일삼은 데 따른 부녀자 공포도 극에 달했다. 멀쩡한 청보리밭을 갈아엎어 일본군을 위한 매점을 만들기도 했고, 토지대금 지급도 충분하지 못하고 제멋대로라 주민들 저항이 거셌다. 일본은 저항이 계속되자 일방적인 군에 반항하는 자는 모조리 사형에 처한다는 군령을 발표해 주민들을 강압적으로 탄압했다. 일제잔재 청산 과정에서 그 흔적이 많이 사라졌으나 송진포 곳곳에는 아직 옛 모습을 기억할 만한 장소가 군데군데 남아있다.

송진포 맞은편 거제 사등면 취도라는 작은 섬에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승전을 이끈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 업적을 기린 포탑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송진포 대봉산 기슭에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해군방비대 사령부 일대에 도고가 친필로 쓴 승전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해방 이후 미군과 주민들이 다이너마이트를 동원해 무너뜨렸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승전을 이끈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 그가 친필로 쓴 승전기념비 기단이 송진포 대봉산 기슭에 남아 있다. 그 자리를 김의부 거제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이 살펴보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

쓰러진 비석은 한동안 파출소 입구 디딤돌로 쓰이다 거제시청 수장고로 옮겼는데 이를 세워둔 기단은 그대로 남아 옛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승전기념비가 세워진 아래에는 제법 넓은 밭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엔 사령부 연병장이 있었다. 이곳에는 받침대만 남은 채 상부가 뜯긴 콘크리트 받침이 있다. 이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도고 승전기념비와 함께 세워진 전시용(폐병기) 어뢰 설치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 밖에 송진포에서 장목으로 향하는 도로변에는 함선에 물을 공급하던 급수저장고가 반쯤 헐린 채 남아 뼈아픈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게 해 준다.

◇장승포 이주어촌을 통한 경제적 침탈 =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과 일본 간 문호가 개방되자 일본은 국책사업으로 광범위한 이민정책을 시행한다. 일본 메이지정부는 어민 증가에도 오랜 관례에 따라 연안어장 사용을 극히 제한했고, 인구 증가와 교통망 발달로 수산물을 찾는 인구는 많아졌으나 어획량은 이를 따르지 못했다. 이에 일본 내 각 지방과 어민들은 새로운 어장을 찾아 헤맸고 가까운 조선 어장은 이들의 타깃이 됐다.

이런 가운데 장승포 이리사무라는 조합에서 직접 어민을 모집해 감독자를 상주시켜 일본인이주어촌 건설에 성공한 대표적인 곳이었다. 장승포는 특히 천연방풍벽이 만 주변을 보호해 선박 정박에 유리한 피난항의 조건을 갖췄다. 고등어, 정어리 어장이 인접해 있어 일본인들은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조합은 이곳에 주택부지 1000평, 어망 수리 부지 400평, 밭 3만 6000평을 매입하고 해안에 220m 규모 방파제를 세웠다. 이주자 주택 55호와 매점, 사원, 어획물 제조소도 건설했다. 인근 산 언덕에는 바다 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워 일본인 어민들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다. 더구나 일본이 러일전쟁을 전후해 장승포를 어업근거지로 삼은 데는 군사적 목적이 깔렸었다. 이곳은 송진포, 마산, 진해와 가까워 일본군에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군용식량보급기지로 적당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장승포에 히노마루간즈메소라는 이름의 일본정부 지정 통조림회사가 있었던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들은 러일전쟁 기간 생산한 통조림을 조선 내 일본군에 공급했다.

일본인 이주어촌 건설과 함께 한국인 어민들이 설 자리를 잃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을사늑약으로 황실어장으로 명성이 높던 대구 어장을 일본인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일본은 어민 간 철저한 분리정책으로 일본인들이 쓰다 버린 어장을 한국인들에게 넘겨줬다. 결국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던 한국인 어민들은 좋은 어장을 가진 일본인들에게 값싼 노동력을 팔며 근근이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장승포 바다는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잔잔하다. 지금은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며 환상의 섬이라 이름붙여진 거제는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한반도 침략 전진기지로 온갖 차별과 핍박을 받은 설움과 울분의 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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