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아너소사이어티] (4) ㈜삼보산업 윤병고 회장

㈜삼보산업 윤병고(64) 회장, 그는 어려운 환경을 딛고 1000억 원 매출의 건실한 중견기업체 대표로 자수성가했다. 2012년 12월 27일에는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 원 기부를 약정, 23번째 경남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그는 자신만의 성공을 넘어 사회 환원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사회,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여전히 실천을 고민하고 있다.

◇오뚝이 같은 도전 정신 = 윤 회장은 한국전쟁이 났던 1950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유산리에서 팔 남매 중 셋째 아들도 태어났다. 윤 회장의 가정도 그렇게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자식 공부에는 열정이 많았던 아버지 덕에 형제 중 유일하게 대학까지 진학할 수 있었다.

그는 월포초등학교, 마산중앙중, 마산고를 거쳐 한양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유난히 좋아했던 축구를 하다 다쳐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저는 의과대학에 가고 싶었습니다. 가정 형편 탓에 건축공학과로 지망했어요. 월급쟁이가 아니라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쳤는데 두 번 떨어지고 한양대 공대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1학년 때 축구를 하다 다리를 다쳤는데 침 맞은 것이 잘못돼 한 2년 정도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 공부를 쉬었어요. 그 후유증으로 군대도 못 갔죠. 2년 지나고 복학을 하려니 같은 학과로 가려면 1년을 더 휴학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몸도 좋지 않았던 그는 결국 고향집에서 가까운 경남대학교 경영학과로 전과편입학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곧장 공인회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리를 다쳐 잃어버린 황금 같은 시간을 그는 합격으로 보상받을 생각이었다.

"편입하면서부터 공부를 했는데, 졸업하고도 계속 시험에 미끄러지면서 서울로 올라가서 또 공부를 했어요. 정말 밤을 새우며 코피가 나도록 했어요. 나중에는 햇빛을 못 봐 몸까지 상하게 되고. 그게 지금 같으면 비타민D 결핍일 텐데 그때는 그것도 몰랐죠."

▲ 윤병고 회장./박일호 기자

하지만 합격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거푸 네 번 시험에서 떨어지고 29살 되던 해 그는 삼성생명에 입사한다. 곧이어 결혼을 했지만 그는 공인회계사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아내와 떨어져 지내면서 낮에는 회사 다니고 밤에는 시험공부를 했지만 그 이후로도 두 번이나 쓴맛을 맛봐야 했다. 결국, 6번의 실패를 끝으로 공인회계사 도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때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런데 살면서 되돌아보니 그 경험과 힘들었던 시기를 견뎌낸 내성이 오히려 살아가는 동력이 되더라고요. 그때는 후회했지만 지금은 후회가 없죠. 평생의 예방주사였고 쓴 보약이었죠."

◇"두 번 실패할 수 없다" = 결국 그는 실패를 뒤로하고 아내와 부모님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의 나이 서른 살, 형님이 경영하던 주유소 소장이라는 직함으로.

"내려와서 큰 형님이 운영하던 주유소 일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업을 시작하는 첫 단추가 됐으니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죠."

그가 힘을 보태면서 형님의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게 된다. 사업은 주유소를 시작으로 택시회사, 레미콘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그렇게 레미콘 사업에 발을 들인 그는 96년 경매로 나온 석산을 인수하면서 지금의 삼보산업을 창업했다. 그리고 곧장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위기를 기회로 활용, 회사를 도약시키는 발판으로 만들었다.

"외환위기가 우리 회사에도 위기였지만…. 그때 많은 회사가 부도나면서 경매 매물이 쏟아졌는데 시가의 40∼50% 가격에 저평가된 물건이 많았어요. 문제는 결단이었죠. 결국 담보대출 자금으로 2000년에 레미콘·아스콘 회사를 경매 받아서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었죠."

그러나 호사다마라는 말처럼 곧장 그에게도 위기가 닥쳐왔다. "외환위기 뒤에 불경기가 오래가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운영자금이 더 들어가게 되고 돈은 없고…. 그로부터 8년 뒤에도 이런 고비를 맞았어요. 그때는 사업을 레벨업하면서 투자를 많이 했을 때입니다. 두 번 다 스트레스 때문에 원형탈모증이 생겨서 병원에 다녔습니다."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그는 그렇게 포기할 수 없었다. "정말 죽을 만큼 힘든 시기였어요. 그런데 제가 포기하면 직원들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잖아요. 뭣보다 공인회계사 시험도 실패를 했는데 이번에도 실패하면 인생 낙오자가 될 것이라는 강박관념이 강했어요. 그렇지만 고시에 실패했던 당시의 상처가 나를 견디게 했던 내성이 된 거죠.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해결책을 찾다 보니 답이 보이고 또 문제가 풀리더라고요."

함안군 대산면에 본사를 둔 ㈜삼보산업은 위기를 딛고 일어서면서 레미콘, 아스콘, 골재, 2차 건설기초 자재 등을 생산하는 지역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지금은 SB금속, SB산업 등 8개의 계열사가 있고 직원들은 300여 명에 이른다. 지난해에는 850억 원의 매출 실적을 기록했고, 올해는 1000억 원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지역사회와 더불어 성장하는 기업' 슬로건을 실천하면서 2010년에는 전국중소기업인대회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더불어 사는 사회,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 윤 회장은 아너소사이어티 기부 외에도 지역의 학생을 위해 거의 매년 수천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또 지난해에는 창원대학교에 발전기금 5000만 원을 기탁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는 놈이 자수성가라면 자수성가인데 이렇게 나름 성공한 것이 사회의 도움 때문 아니겠어요. 오래전부터 지역과 더불어 살며,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마음의 짐을, 그동안의 숙제를 조금 한 것이고, 앞으로도 여력이 되면 실천을 해야죠."

그는 기부를 결정한 것을 두고 조금 더 우리 사회가 함께 행복한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의미였다고 설명했다.

▲ 23번째 경남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이름 올린 윤 회장./박일호 기자

"국민이 사업가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으로 봅니다. 이제는 기업들이 앞장서서 환원하고 더불어 살기 위한 사회적 책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돈이 없어도 자신의 능력을 쪼개어 재능을 기부하고 자원봉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선행이 확산하고 행복바이러스가 퍼지면 좋은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 봅니다. 쑥스럽지만 인터뷰에 응한 것도 이러한 문화가 확산하길 바라는 뜻에서입니다."

윤 회장은 퇴임 이후 장학사업 추진을 모색하고 있다. 인재 양성이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물적 자원이 부족하죠. 또 조만간 심각한 고령화에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다행히 우리나라는 인적 자원이 풍부합니다.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하고 이들이 창업을 하거나 창조적인 일을 함으로써 미래의 먹거리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런 만큼 올바른 교육 시스템 마련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소득수준이 높아도 행복지수는 높지 않습니다. 비뚤어진 교육 때문이죠. 적성과 관계없이 부모의 욕심에 따라, 사회의 시선 탓에 억지로 공부를 시킵니다. 경쟁만 치열해지니 행복할 수가 있나요. 저는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해지는 기본조건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독자적으로 장학사업을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학생들을 지원하고 또 학생들 적성에 맞는 교육이 가능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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