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내 맘대로 여행] (56) 충남 아산 현충사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소설가 김 훈은 2001년 봄, <칼의 노래>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책머리에 이런 소회를 밝혀 놓았다.

이순신 장군 탄생 470주년이 지난달 28일이었다.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자리 잡은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이 혼인하고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살았던 옛집이 있다.

보물 제326호인 '충무공 장검' 두 자루가 보존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을 기념해 매년 4월 28일 제전을 올린다.

이순신 장군은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의 표상으로 꼽힌다. 그런 추앙은 그를 수식하는 '성웅'이라는 칭호에 집약돼 있다.

충남 아산시 염치읍에 위치한 현충사 전경. /최규정 기자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위업을 기리고자 1706년 아산 지역 유생들이 조정에 청해 허락을 받아 세운 사당이다.

1707년 숙종은 '현충사'란 액자를 하사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현충사는 철폐됐다가 1906년 을사늑약에 분노한 유림들이 현충사 윤허비를 건립했다.

일제강점기 이충무공 묘소가 경매로 일본인 손에 넘어갈 지경에 처하자 우리 민족 지사들이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해 민족 성금을 모아 1932년 현충사를 중건했다.

건물 안쪽 벽에는 이순신 장군의 일생 중 특기할 만한 사건 10가지를 묘사한 '십경도'라는 그림이 있다.

충무공의 청년 시절이 담긴 아산 현충사에는 찬란한 봄이 한창 진행 중이다.

기개를 뽐내는 소나무 그 사이사이로 목련과 수양 벚꽃 등 오색 봄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에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록과 업적, 사용했던 물건들이 전시돼 있다.

수많은 전시관을 둘러봤지만 이순신 장군의 각종 흔적을 찾아보는 관람객들의 관심은 단연 높아 보였다.

수백 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순신 장군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준엄한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순신 장군이 결혼한 21세부터 지냈던 옛집의 현재 건물은 전통적인 한식 목조건물인데 안채만이 당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혼인 후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살았던 옛집. /최규정 기자

대대로 종손이 살아오다가 지난 1969년 경내의 존엄성을 고려해 이주했다. 옛집 뒤편에는 가묘가 있는데 이곳에는 현 종손의 4대조까지 신위와 함께 이순신 장군의 신위가 중앙에 모셔져 있다.

옛집 옆 은행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곳은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던 자리라고 전해진다.

과녁판은 활터에서 남방으로 145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이순신 장군이 연습하던 당시에는 200m 거리였다고 전해진다.

임금이 북쪽에 있으니 항상 남쪽을 향해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한다.

정려는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게 임금이 편액을 하사해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에 걸어두는 건물인데 현충사 정려에는 이순신 장군과 공의 조카 이완, 사대손 이홍무, 오대손 이봉상 등 5인의 편액을 보존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 조카 이완, 사대손 이홍무 등 5인의 편액을 보존하고 있는 정려. /최규정 기자

현충사를 나서는 길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와 천안아산지회 주최로 친일화가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교체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펼쳐지고 있었다.

시리도록 눈부신 봄날이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야음'이란 시를 꺼내 읽어 본다.

한 바다에 가을비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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