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비춤]엄마의 세월

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 엄마가 딸아이 손을 꼭 잡고 산길을 걸었다. 밀양 만어사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길가에 맨드라미와 들꽃이 가득이다. 햇살을 등지고 따스하게 걷던 두 사람이 정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내가 카메라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밝게 웃는 할머니와 손녀 사진을 기대했지만, 어긋났다. 엄마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고, 딸아이는 바닥만 내려다봤다. 그 모습이 그대로 사진에 담겼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엄마 사진을 뒤적이다 발견했다. 어느덧 사진 속 꼬마 숙녀였던 딸아이는 고등학생 아가씨가 됐고, 엄마는 지난해 구순을 넘겼다. 엄마는 사진 찍히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지만, 틈틈이 찍어둔 엄마 사진이 고맙게 느껴진다.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 봄기운 가득한 두 사람이 붓끝에 되살아났다.

30년 전 엄마는 진해 집 마당 한가운데에 푸른색 한복을 입고 단정하게 서 계셨다. 서른아홉 살에 낳은 막내아들이 미술대학에 가서 유화를 배워 엄마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해서다. 쪽 진 머리를 한 검은 머리의 엄마는 쪼글쪼글했다. 할머니였다. 그 당시 진주로 대학가서 자취하는 아들 집에서 하룻밤 묵은 엄마는 집으로 돌아가서 며칠 밥을 못 드셨다. 엄마와 함께 사는 형수가 혼자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아들 생각에 어머니가 식사를 못하신다고 연락이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림을 배우며 가장 행복했던 그 시기에 엄마는 품을 떠난 아들 걱정에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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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갈수록 엄마는 가족들을 흐릿하게 기억했다. 봄이면 쑥을 캐고 가족, 친구들과 진해 벚꽃 구경도 곧잘 하던 엄마가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집에 누워계시다 허공을 응시하는 시간이 늘었다. 무심코 봤던 턱밑에 난 작은 혹이 도드라져 보였다. 깊게 팬 주름에 검버섯이 한 가득이다. '저승 꽃'처럼 보여 마음이 무겁다.

"엄마, 내가 누군교?" "막내 아이가." 요양병원에 누운 엄마는 힘없는 목소리로 막내아들을 기억했다가, 다시 시간이 지나면 모른다는 듯이 울상을 지었다. 40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5남매를 홀로 키우던 엄마가 애태우며 키웠던 자식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 늘었다. 웃으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얼굴에서 가셨다. "와 이리 안 죽노." 언젠가부터 힘겹게 하시는 말씀이다.

대학시절 엄마, 손자, 손녀들과 함께하던 엄마,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 어떤 모습도 놓치지 않고 싶었다. 오래된 사진첩에서 사진을 꺼내서, 찍기 싫어하는 엄마 사진을 새로 찍어서 그림에 담아냈다. 오일, 수채화, 아크릴로 서른 점 넘게 그렸다. 엄마 초상화 앞에 우두커니 섰다. 그림 속 엄마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본다.

"엄마! 화창한 봄날, 막내아들 손잡고 꽃구경 가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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