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9) 거제지역 3·1운동

거제도는 진해만과 가덕도로 연결되는 남해안 해상교통 요충지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일제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해군기지와 포대를 거제 곳곳에 설치했다. 어업전초기지로 일본인 이주어촌도 일찍이 형성해 경제 수탈도 본격화했다.

이에 따라 일제강점기 일본 군인들 횡포와 일본인 지주·어장주에게 수탈당한 거제도 주민들의 일제에 대한 불만은 매우 높았다. 항일독립을 바라는 기운도 그만큼 컸다.

◇배 공장이 집어삼킨 항일독립운동 현장 = 거제 옥포에서 아주를 지나 장승포를 향하는 길이면 꼭 마주치게 되는 대우조선해양 공장. 거대한 주황빛 몸체를 자랑하며 우뚝 선 골리앗 크레인에 각종 대형 부품 공장, 선박이나 해양플랜트 제작에 쓰일 철 구조물이 어수선한 이곳은 96년 전만 해도 거제 이운면, 연초면 주민 2500명이 항일독립을 염원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역사 현장이다. 1919년 4월 3일 당시 아주장터였던 이곳에서 거제 3·1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다른 지역에 들불처럼 번진 항일만세운동 소식을 들은 윤택근 선생은 장승포, 아양, 옥포지역 청년들을 규합해 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윤 선생과 뜻을 함께한 이주근·이인수 등은 4월 1일 이운면 아양리 서당에 모여 종이 10여 장에 대한제국독립만세(大韓帝國獨立萬歲)라 크게 쓴 격문을 만들었다. 이튿날 이들은 아주리 이선이 집에 모여 회합을 했다. 회합 후 이인수는 이중수와 함께 격문을 눈에 잘 띄는 집 대문에 붙이거나 아주장터 길 위에 뿌렸다.

다음 날인 4월 3일 아주리 장날을 맞아 윤택근, 이주근, 이인수, 이중수 등은 오후 7시 30분쯤 장터에 모인 주민 250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거제지역 헌병분견소와 송진포 해군방비대, 가조도 해군경비대 등에서 헌병 경찰들이 출동해 시위를 진압했다. 이때 윤택근, 이인수, 이주근 등이 검거돼 대구 복심 법원에서 1년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거제군지>에는 만세시위는 당등산성을 출발해 아주장터로 향한 것으로 돼 있다. 아주장터는 향토사학자 전갑생 씨가 연구 조사한바 정확한 위치는 대우조선해양 내 옥포정과 다목적홀 부근으로 알려져 있다.

거제 아주동 3·1운동 기념비.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옥포로 번진 독립만세 물결 = 아주장터에서 일어난 항일독립에 대한 열망의 불길은 인근 옥포리로 번졌다. 옥포에서 서당을 하던 주종찬 선생은 4월 3일 윤택근, 이인수, 이주근 등과 함께한 아주장터 만세 시위 이후 5일 옥포교회 교인들과 함께 옥찬영의 집에서 재차 시위할 것을 결의하고 실행에 나섰다. 이들은 대한국독립만세(大韓國獨立萬歲)라 쓴 크고 작은 종이 깃발을 만들었다. 다음 날인 6일 오전 11시께 주종찬은 자신이 큰 깃발을 들고, 앞장서고, 작은 깃발은 서당 학생들에게 들도록 한 후 망덕봉에서 출발해 옥포리 일대를 행진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주종찬의 선창에 인근 주민 200여 명이 호응해 합류하면서 옥포를 지나 아주장터로 향했다. 이들은 오후 4시가 넘어서까지 아주장터를 지나 이운면사무소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망덕봉 주변은 넓은 공터가 있어 예부터 여러 사람이 모여 자주 회합을 한 장소였다. 한데 옥포시가지정리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터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옥포중앙시장이 들어섰다.

◇잊힌 주인공들과 어설픈 기념 논란 = 거제에서는 이 같은 3·1항일독립만세 운동 정신을 기리고자 지난 2001년 옛 아주장터가 내려다보이는 탑골 언덕에 거제 3·1운동기념탑을 세웠다. 아주 3·1운동기념공원으로 이름붙여진 이곳에는 기념탑과 함께 거제 3·1운동 약사를 새긴 비석과 옥포에서 항일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주종찬 지사를 기념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나름대로 지역 항일독립운동 역사를 기억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관 주도로 이뤄지는 형식적인 기념 의식과 행사가 역사 왜곡과 부실을 낳았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2011년부터 탑골 일대에서 펼쳐지는 아주 독립만세 운동 재현기념행사를 두고 벌어지는 설왕설래가 대표적이다.

아주동 번영회가 주도하는 거제 3·1운동 기념사업회는 매년 5월 2일을 아주장터 만세 운동일로 정해 재현기념행사를 벌이고 있다. 올해 재현행사도 5월 2일 오전 10시 기념탑과 아주공설운동장 일대에서 하기로 하고 팸플릿을 제작했다. 아주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이 1919년 음력 4월 3일 치러졌기에 양력 5월 2일이 맞다는 주장에서다. 반면 이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양력 4월 3일 운동이 펼쳐졌다는 견해다. 일제강점기에는 전국적으로 양력제가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력제는 일제강점기 이전 대한제국기인 을미개혁(1895) 때 공표됐다. 당시 을미개혁은 신내각 인사들이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일본의 조선지배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 성격이 짙다.

1919년이면 을미개혁으로부터 24년, 을사늑약에 따른 한일강제병탄 14년이 된 해였던 만큼 양력제가 완전히 정착된 시기로 볼 수 있다.

김의부 거제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은 "당시 일제 재판 기록은 물론 거제 항일독립만세운동을 다룬 거제 관련 신문·잡지 기사 모두 거사일을 양력 4월 3일로 기록해두고 있는데 아주동 번영회는 뚜렷한 역사적 증거도 없이 계속 5월 2일을 고집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개탄했다. 독립기념관 역시 아주장터 3·1운동 사적 조사 보고에 4월 3일을 거사일로 명시하고 있다.

이 밖에 지역성과 동떨어진 기념행사도 문제다. 올해 재현기념행사 팸플릿을 보면 '3·1독립선언서' 내용만 빼곡하다. 민족대표 33인이 요릿집 태화관에서 한 번 읽고 일본 경찰에 자진 출두해 비난을 받는 그 내용이다. 이를 두고 윤택근·이주근·이인수·이공수·이중수·주종찬 등 거제인들이 만든 역사를 의도적으로 은폐·왜곡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이는 윤택근 등 아주장터 3·1항일독립만세를 이끈 사람 다수가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했다는 점과도 연결지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거제문화원 향토사연구소는 최근 3·1 민족운동가 70여 명을 새롭게 발굴해 발표했다. 이번 재현 행사에 이들에 대한 설명과 소개 시간이 따로 마련되지 않았다면 비판 대상이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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