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하고 싶은 일은 아직 너무 많아요"

"매일 아침,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면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설렙니다." 보통 혈기왕성한 청소년에게 '팔딱 팔딱'이라는 표현을 쓰게 된다. 이 표현을 일흔 넘은 어른에게 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군이 되고 싶었던 소녀 서울로

이송아 씨(72)는 일전에 인터뷰한 강진상(74) 전 합천국민보도연맹희생자 유족회장의 소개로 알게 됐다. 2월 초 '임 기자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말에 커피숍에서 20분 정도 대화를 나누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는 느낌이 단박에 왔다.

이송아 씨는 창원시 동읍 주남저수지 인근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주남저수지는 윗늪이 있고, 아랫늪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우리가 아는 주남저수지는 아랫늪이고, 물이 맑아서 식수도 주남저수지 물을 떠먹고, 민물새우를 잡곤 했다. 큰 기왓집에서 머슴 3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덕분에 여자로서는 드물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그에게는 꿈이 생겼다.

"이웃집 오빠가 '여군 장교 해보지 않을래'라고 하셨어요. 생각해 보니 여군을 해 보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여군 군복이 멋져 보였고…. 그러나 아버지가 반대하셔서 여군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꿈 하나를 또 풀어놓았다.

"사실 여군도 되고 싶었지만, 고아원 원장도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16~18살 정도 먹은 머슴이 우리 집에 왔어요. 야단을 많이 맞았죠. 그게 너무 불쌍한 겁니다. 그래서 저는 집에서 빨래도 잘 못하지만, 머슴 삼베옷을 빨아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때 나는 크면 고아원 원장이 돼야겠다 싶었습니다. 고아원 원장은 못 됐지만, 그래도 유치원 선생도 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있어 봤죠."

여군이 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그는 진해 큰 언니 집에서 머물게 됐다. 형부는 해군에서 일하고 있었다. 형부의 소개로 그는 지극히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게 된다. 남편은 내무부 공무원이었다.

24살에 결혼을 하고 30살에 남편이 갑자기 서울로 발령 나면서 서울 생활을 하게 됐다. 서울 돈암동 한옥집에 전세를 얻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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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송아 씨./임종금 기자

'팔딱 팔딱' 열정이 넘쳐 흐른다

-지금 경기민요 전수자로 돼 있으신데요. 언제부터 소리를 하기 시작하셨나요?

"제가 1989년에 방송통신대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한 뒤 편입해서 유아교육학과에 갔습니다. 그때부터 소리를 조금씩 부르기 시작하다 1995년에 국악원에서 전수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 하셨나요?

"초등학교 때부터 독창을 도맡아 놓고 했습니다. 이게 친정아버지 영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다 보면 아버지가 새벽에 시조를 읊으십니다. 또 염불을 하시기도 합니다. 저를 이렇게 앉혀 놓고 염불을 하신 겁니다. 그 영향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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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송아 씨 서울 활동 당시 사진./이송아 제공

-소리 외에도 또 하신 것이 있습니까?

"국악을 했으니 소리 말고도 사물놀이하고 춤추고 하는 것은 기본으로 배웠습니다."

-헌데 소리나 춤, 사물놀이 이런 것을 활용할 곳이 많이 있습니까?

"저는 타고난 성격이 빈 공간을 두고 못 보는 것 같습니다. 빈 공간만 있으면 동네 꼬마들 모아 놓고 소리를 가르쳐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유아교육과를 나왔기 때문에 아이들도 가르쳐봤거든요. 돈이 안 되지만 주민자치센터 같은 곳에서 주민들을 가르치고, 노인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약한 분들이나 가난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찌 된 게 저는 부유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평생 한 번도 안 들었습니다. 물론 저도 아껴 써야죠. 당시(1980~90년대) 공무원이 얼마나 박봉이었습니까? 서울에 있을 때 산에서 약수를 뜨고 나서 바로 집으로 안 내려오고 빙 둘러서 산동네를 둘러보고 옵니다. 거길 가 보면 정말 한 여름 그 더운데 집에 공간이 없으니 문턱에 앉아서 땡볕에서 밥을 먹고 있는 겁니다. 집에 가면 남편에게 얘기했어요. 우리 집은 산동네에 비해서는 별장이다. 그러면서 다짐을 한 것이 '공무원 부인이 위를 쳐다보면 남편에게 도둑질하라는 것밖에 더 되나. 항상 낮게 살아야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10년 정도 민요·생활체조 강사를 하다 2002년 5월 갑작스레 마산으로 오게 된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빠(남편)가 1994년에 죽었어요. 그런 말이 있잖아요. 여자가 남자를 너무 사랑하면 남자가 일찍 죽는다고. 외롭잖아요. 마산에는 형제도 있고 의지하며 살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그는 시종일관 남편을 아빠라 불렀다. 남편 얘기를 할 때마다 목이 멨다. 마산에 내려와서도 그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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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송아 씨 서울 활동 당시 사진./이송아 제공

"구암동 한전 터 앞에 보니까 공터가 있는데 거기 게이트볼장이 있습니다. 제가 생활체조회를 개설해서 100명 정도 모았습니다. 아침 6시 타임인데, 저는 생활체조를 하면서도 국악을 하는 강사라서 서울에서도 특별하다고 했었어요. 댄스스포츠를 해맞이 춤 체조를 바탕으로 가르쳤어요. 그게 마산시 생활체육회 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습니다. 집을 옮긴 뒤에는 마산종합운동장에서 또 생활체조회를 개설했습니다. 이건 별것 아닙니다. 제가 서울 있을 때는 아침 6시, 9시, 2타임 생활체조를 하고 오후에 국악원에서 3타임 실습을 했습니다."

-그렇게 막 몸을 움직이시면 탈이 나지 않습니까? 자녀도 있고, 이게 다 40대 중반이 지나서 한 것인데.

"좋아서 하는 것은 결코 병이 안 납니다. 즐겁게 하는 것이니까요."

서울에서 온 뒤 마산대학교와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강의를 했으며, 주민자치센터에서도 강의를 했다. 한 번은 함안 지역 노인 경로당 300곳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작년부터 그는 '신 무기'를 개발 중이라고 했다.

"마이클 잭슨 아시죠? 그 사람 춤을 좀 배우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창동예술촌 쪽에 강의하는 곳이 있어서 수업을 좀 받다가 지금 이제 조금씩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학원에서 배우고 싶다고 상담한 뒤에는 잠이 안 오더라고요. 설렘 때문에. 지금까지 4번 정도 공연했고, 오늘 창동 '노란잠수함'에서 공연을 합니다. 보러 오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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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안무 준비를 하고 있는 이송아 씨./임종금 기자

갑작스런 제안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당일(3월 7일) 저녁 7시 마산 창동 '노란잠수함'이라는 호프집에서 정법사 신도회 주최로 모금 행사가 열렸다. 행사장에 가자 그는 다른 젊은 소리꾼들과 함께 한복을 제대로 차려입고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부 공연을 끝내고 나서 기자는 한동안 다른 공연을 보고 있었고,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어깨를 쳤다. '어때요?' 정말 마이클 잭슨과 똑같은 차림으로 그는 서 있었다. 누가 그를 일흔 넘은 사람으로 알겠는가. 마이클 잭슨 빙의를 받은 그는 무대에서 현란한 안무를 선보였다.

"여기 바닥이 안 미끄러워서. 마이클 잭슨 춤은 바닥이 미끄러워야 안무가 풀리는데…."

그는 아쉬워했다. 그렇지만 기자도 행사에 참석한 신도들도 충분히 놀랄 만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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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안무를 하고 있는 이송아 씨./임종금 기자

실버 예술대학 만들고 싶다

-도대체 어떤 생활습관을 가져야만 선생님처럼 젊게 살 수 있는 겁니까?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할 때 10년이 늙어집니다. 꿈이 없어질 때는 더 늙어집니다. 꿈을 갖고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무엇을 하느냐 보다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예를 들어 수영하고 나서 '아이고 힘들다'고 하는 순간 늙는 것이고 '아, 좋다'라고 하면 젊어지는 것입니다. 또 운동을 할 때는 20분 이상 숨이 턱에 찰 정도로 해야 합니다. 또 요즘 수영이 유행인데, 수영만 해서는 제대로 된 운동이 안 됩니다. 근력운동과 병행해야 합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그의 명함을 찬찬히 살펴보다 '웰다잉 지도사'라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또 뭘까?

"만일 우리가 죽으면 말이죠, 준비된 죽음과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뚜렷이 다릅니다. 갑자기 죽으면 당사자부터 가족들까지 당황하게 됩니다. 하지만 준비된 죽음은 하기 따라서는 대단한 죽음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적어 놓고 실천하는 것) 이런 문화가 일고 있질 않습니까? 이와 관련된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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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민요를 부르고 있는 이송아 씨./임종금 기자

-조금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럼 웰다잉 지도사는 무엇을 합니까?

"웰다잉 지도사는 노인대학 같은데서 강의도 하고, 체험교육도 하는 겁니다. 서울에서는 활성화됐는데 아직 지역에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가끔 강의를 하러 가면 2/3은 스님들입니다."

-그럼 선생님의 버킷리스트는 뭡니까?

"올해 봄이 왔으니 전국 일주를 하는 것입니다. 혼자 배낭을 메고 제 방식대로 일주를 할 겁니다. 예를 들어 전라도 어느 군청에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뭐 하는 사람이다. 노인정에서 어르신들에게 공연·봉사를 하고 싶다' 그러면서 그 지역을 여행하는 것입니다. 강의에 메여 있기 때문에 외국에는 못 나갈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건 없습니까?

"많죠. 창원에는 실버 예술단이 있는데, 마산에는 없어서 실버 예술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실버 예술단에서 더 높은 게 실버 예술대학인데 그것까지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또 올해 안으로 SBS <스타킹>에 나가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습니다. 꿈이 너무 많으면 개꿈이죠."

-지역에서 도와주시는 분이 많이 있습니까?

"제자들 도움으로 '웰예술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사실 저 혼자 하는 단체죠. 왜 이걸 만들었냐 하면 서울에서는 그냥 주민센터에 얘기하고 무얼 하겠다 하면 어지간해서는 들어 줍니다. 그런데 지역에서는 무슨 '증'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사업자 등록을 내고 만든 단체입니다."

이 외에도 그는 꿈이 너무 많았다. 주위에 노인들 1000명 정도 모아서 공연을 하고 싶다고도 했고, 최근 자전거 타는 재미에 빠져 있었고, 그 와중에 또 창신대학교 음악과 국악 전공을 했다. 도대체 그 열정은 끝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기자님, 봄이 왔어요. 봄이. 정말 주위에 보면 할 게 많아요. 설레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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