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고통은 욕심과 욕망에서 시작…스스로 일상 되돌아보며 여유 찾아야

모든 종교의 출발점은 인간의 고통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생·노·병·사이다. 만약 인간에게 고통과 불행이 없었다면 종교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 고(苦)의 해결을 위한 종교의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인간 고의 원인을 외적인 데서 찾아내고 해결의 방법 역시 타인의 구제에 의하는 타력신앙이다. 다른 하나는 그 원인을 인간 자신에게서 발견하고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는 자력신앙이다. 불교의 가르침 역시 인간 스스로 자기 자신의 믿음과 의지에 의해 해결해야 하며 누구의 도움도 인정하지 않는 '인간에 의한 종교'다.

이런 질문이 있었다.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다른가?' 엉겁결에 받은 질문이라 약간은 당황하였지만 차분하게 설명했다. 원래 말 자체가 다르니 다르다 해도 되지만 사실은 깨달은 사람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나 똑같다. 깨달은 사람도 꼬집으면 아프고 못 깨달은 사람도 꼬집으면 아플 수밖에 없다. 역시 깨달은 사람도 슬픈 일 있으면 눈물 나오고 깨닫지 못한 사람도 슬픈 일 있으면 눈물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정말 다른 게 있다면 벌써 병폐이다. 모든 것은 불이법(不二法)이라 다 같은 것이다. 다만 깨달은 사람은 어떠한 경계에도 헤매지 않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처처에 헤매게 된다. 그게 다르다는 것이다. 깨달았다 해도 대소변 안보고 밥도 안 먹고 꼬집어도 아픈 줄 모르고 마치 돌덩이처럼 무감각하게 되는 게 아니라 깨달으나 못 깨달으나 똑같다는 사실이다.

깨닫고 나면 어떤 망상이나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가? 물론 당연히 깨닫고 나서도 망상이 일어나면 깨달은 게 아니다. 생각을 일으켜도 자기가 일으키려면 일으키고 말면 말고, 저절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경계의 그물을 벗겨 소화시켜야 하는 것이라 중생놀음을 해도 일반 중생들처럼 갈팡질팡 생사 고해를 헤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깨달은 후에는 모든 것을 환하고 밝게 활용하는 빛(光明)이 있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의 경계는 망상이 없으며 망상 구덩이에 빠져 있어도 다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잘 쓰면 다 좋은 것이고 못 쓰면 다 나쁜 것이다. 무유정법(無有定法)이다. 정한 법이 없다. 일체를 이익되게 쓰면 그게 잘 쓰는 것이다. 자기가 닦는 것만큼 세계가 넓어지고 또 시야가 넓어진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허망한 생각, 즉 망상적 꿈에서 깨어나야 할 때다. 불교는 차별이 없다. 나다, 너다 하는 차별이 없는 무아(無我)이다. 누구든지 성불하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존재, 똑같이 소중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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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자리에는 빛과 경계가 없다고 했다. 본래가 무일물(無一物)의 자리이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빛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모양도 없는 일체 오온인 색, 수, 상, 행, 식이 끊어진 자리이다. 그것은 어쩌면 없으면서도 있음을 부러워하지 않고 비어 있으면서도 채움을 부러워하지 않았던 이유일 것이다. 우리 모두 한 번쯤 일상을 돌아보면서 유유자적하면서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자재함을 잃지 않는 반야자성(般若自性)을 회복함으로써 행복한 생활을 추구해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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