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세요?" 누군가 묻는다면 선뜻 "네 물론이죠"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혹자는 인생에 주어진 유일한 의무는 행복이라 했다. 권리란 본인 선택으로 누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만 의무는 반드시 해내야 하는 책임이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행복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이 말은 듣는 이에게 많은 생각을 던진다. '과연 나는 행복한가, 혹여 나의 행복이 타인의 것보다 초라한 것은 아닌가, 내가 누리는 이 감정을 그렇게 이름 할 수 있을까.' 그 가운데 으뜸은 바로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하는 의문이다. 아마도 각자가 추구하는 방법이 매우 다르고 주관적이기에 '이것이야말로 목적에 이르는 길'이라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소유가 행복이라는 등식이 일반화되어 있다. 하지만 때로는 결핍이 그 감정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기도 한다.

올해 마산도서관과 경남점자정보도서관에서 공동 운영하는 시각 장애인 대상 독서 프로그램 '듣는 책 느끼는 책' 개강일에 행복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먼저 행복에 관한 시를 한 편 읽고 수강생들이 각자 마음으로 느끼는 행복을 말하게 해보았다. 보지 못하는 절대 불편을 지닌 시각장애인들의 행복도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분들의 행복 앞에는 '비록 시력은 잃었지만'이라는 단서가 붙었다. '같이 술 마실 친구가 있는 것, 평범한 일상을 지속할 수 있는 것, 컴퓨터로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것, 부담 없이 누울 자리 있는 것, 이른 아침 설레는 산책길에서 하루를 맞이하는 것, 살아있다는 것, 지금만큼이라도 볼 수 있는 것, 아침에 어딘가로 갈 곳이 있다는 것, 나를 얽어맨 짐을 다소나마 던 것, 구천 냥 눈을 잃었지만 천 냥의 밑천 남아 나를 사랑하는 것, 아침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느끼며 삶을 확인하는 것' 등이 그분들이 말씀하신 답이었다.

보지 못하는 절대 불편 가운데 지금만큼이라도 볼 수 있고, 빛이나마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는 답은 두 눈 멀쩡히 뜨고 모든 빛과 색에 열려 있으면서도 보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정안인(正眼人)들을 부끄럽게 한다. 헬렌 켈러는 자신의 저서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서 친구와 숲을 산책한 뒤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을 때 '별로 본 것이 없다'는 대답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단지 만져보기만 해도 그토록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데 모든 것을 보고도 그렇게 대답을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리라.

수업을 하면서 "선생님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하는 인사를 들을 때마다 부끄럽다. 나야말로 이 강의에서 가장 많이 배우고 얻은 사람이므로 오히려 내가 인사를 해야 옳다. 삶에 대한 경건함, 결핍이 주는 소박한 행복을 배웠고 좋은 친구도 얻었다. 그 친구는 볼 수 없으나 언제나 냉철한 직관과 따뜻한 위로로 나에게 답을 준다. 올해 3년째, 처음엔 시간마다 울지 않을 수 없었던 수업에서 이제는 많이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되돌아 나오는 길, 새로운 눈으로 산과 들과 물길을 본다. 연초록의 신록이 천지에 가득하다. 그 연둣빛이 바라보는 눈길에 묻어나올 듯하다. 벚꽃과 진달래 진 자리에 영산홍이 피어나고 있다. 빛으로 가득한 세상, 온갖 색의 향연에 현기증이 인다. 저토록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서, 저 황홀한 봄의 향연을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해마다 누릴 수 있어서 참 좋다.

윤은주.jpg
나의 수강생, 내 친구 시각 장애우들이 가르쳐 준 귀한 가르침으로 장애인의 날, 오늘 하루도 "네, 행복합니다"하고 크게 말할 수 있다. 오늘 나는 생의 의무를 다했다.

/윤은주(수필가·한국독서교육개발원 전임강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