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⑻ 양산지역 항일독립운동

북쪽으로 울산, 남쪽으로 부산과 김해를 접한 양산은 예부터 이들 대도시의 위성도시 역할을 한다고 흔히들 알고 있다.

현재 십여 년간 신도시 개발과 시세 확장으로 사람들이 꾸준히 유입되면서 전국에서 인구증가율이 두 번째로 높은 도시로도 이름나 있다.

점차 발전하는 도시 이미지에 맞춰 영어 슬로건도 'Active(활동적인·능동적인) 양산'으로 정해 젊은 도시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흔히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양산은 한말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특히 양산읍내와 통도사를 중심으로 한 하북면에서 치열하게 펼쳐졌는데 지금은 이를 기억할 만한 흔적을 찾기 어려운 게 아쉬울 따름이다.

◇경남 동부 유일 의병장 서병희 = 양산 상북 좌삼 출신으로 한의업에 종사하던 서병희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국운이 기울자 업을 버리고 1907년 서울로 갔다. 의병장 허위 부대에 참여한 뒤 13도 창의군 서울 진공작전에 참여했다. 이 작전이 무산되자 허위는 경상도에서 거사하라는 밀지를 서병희에게 보냈다.

서병희 의병장은 밀지 내용을 받들어 해산병을 인솔해 고향인 양산에서 거병, 경남 전역을 무대로 활약했다. 처음에 양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서 의병장은 1908년 6월 13일 밤 양산 하북면 답곡리 통도사 인근 성천마을 여인숙을 급습해 숙박 중이던 일본인 2명과 한인 3명을 총살하고 도주했다.

일본군·경의 계속되는 추격에도 서 의병장은 산청과 함안, 합천, 창원, 고성을 종횡무진하며 전과를 올리다 이듬해 밀고로 체포돼 향년 43세로 순국했다. 서 의병장이 거사를 치른 성천마을 여인숙은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그곳이 의병 활동이 이뤄진 곳인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상북 좌삼 서씨 집성촌 재실 앞에 의병장을 추모하는 비가 서 있다.

◇경남 최초 3·1운동이 양산에서 = 양산지역 3·1항일독립만세운동은 통도사 지방학림 유학승들과 양산읍내 유지인 엄주태, 전병건 등에 의해 3월 13일부터 4월 초까지 통도사 인근 하북면 신평, 양산읍내 등지에서 이른 시기에 전개됐다.

양산은 경남지역 최초의 3·1항일독립만세운동으로 기록돼 있다. 1919년 3월 27일 군중 3000여 명이 독립 만세를 외쳤던 옛 양산장터 일대 모습.

서울 3·1운동에 참여한 오택언은 5일 통도사에 도착해 통도사 지방학림 학생대표 김상문, 통도사 강원 승려 등과 함께 13일 신평 장날에 만세 시위를 하기로 계획했다. 이들은 밀고자에 의해 계획이 발각돼 오택언이 검거되는 시련에도 신평장날 하북면 줄다리기 대회를 빙자한 군중집회를 열었다. 이때 통도사 부속 보통학림과 지방학림 학생 수십 명, 불교 전수부 학생 10여 명 등이 군중과 합세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는 밀양과 함께 경남지역 최초의 3·1항일독립만세운동으로 기록돼 있다.

양산 중부동에 살던 엄주태는 1919년 3월 12일 분위기를 파악할 겸 부산에 갔다가 마침 13일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벌인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목격한다. 이튿날 전병건과 만난 엄주태는 부산 소식을 전하며 양산 의거를 논의했다. 거사일을 27일로 정한 이들은 엄주태 집에서 대량으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한 후 예정한 27일 양산장터에서 다른 주요 인사, 군중 30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장터는 삽시간에 독립만세 함성으로 뒤덮였고 시위 군중은 여세를 몰아 양산군청으로 시가행진을 감행했다.

당황한 양산헌병분견소 헌병과 순사들은 시위 군중을 저지하며 주요 인사들을 체포했으나 이에 더욱 분노한 군중은 헌병분견소와 군청 앞에서 대치하며 구인된 자들 석방을 외쳤다. 구인된 청년들 석방을 약속받은 시위 군중은 자진해 해산했으나 양산헌병분견소는 엄주태를 비롯한 주요 인사 7명을 다시 구인해 부산헌병분대로 이관한 후 부산 감옥에 수감시켰다. 해산 군중은 이들이 재구속됐다는 소식을 듣고 4월 1일 재궐기했다. 군중 2000여 명이 양산 시가지를 누비며 만세 시위를 벌이며 양산헌병분견소로 진격, 구속자 석방을 외쳤다. 일본 헌병은 이들을 공포탄으로 위협해 강제해산하고 이때 중심 인물인 이귀수와 류경문 등을 구속했다.

엄주태 등 주요 인사가 투옥됐던 옛 헌병분견소.

이 같은 3·1항일독립만세운동의 숭고한 뜻을 살리려 기념비를 건립했으나 실제 만세운동이 일어난 현장과는 멀리 떨어진 물금읍에 자리 잡고 있다. 매년 3·1절에 재현행사도 열리고 있지만 현장에 안내표지판 또는 표지석을 세울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중 양산헌병분견대 앞은 이후 1931년 양산경찰서로 바뀌고서 일본인 대지주들의 고율 소작료 요구에 반대하는 양산농민조합 조합원들을 검거해 구금한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옆 옛 양산군청(현 양산 중앙동 주민센터) 자리와 함께 역사를 기억할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청년회관을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도 활발 = 3·1항일독립만세운동 열기가 이어지던 1920년 7월 15일 양산청년회가 내외빈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양산군 공립보통학교에서 창립했다. 양산청년회 주요 구성원은 지주 혹은 상업자본가들이었다. 양산청년회는 사회 혁신과 문화 공헌을 위한 건강 증진, 지식 확대, 단결을 통한 산업 진흥을 목적으로 각종 사업을 추진하고자 참석자 의연금으로 회관을 건립하는데 현재 양산미션문화센터 자리가 그곳이다. 청년회관은 순회강연회, 학술토론회 등 장소로 활용됐으며 노동야학회도 개설되는 등 명실공히 양산지역 문화 사회운동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1922년에는 양산부인회 창립대회장으로 사용됐으며 1927년 기존 청년회를 혁신 발전시켜 탄생한 양산청년동맹 회관으로 명칭을 바꾸기도 한다. 특히 1928년 양산청년동맹과 지역 유지들에 의해 신간회 양산지회가 창립될 때 대회장으로 사용됐으며 이듬해 근우회, 1931년 신간회 양산지회 해소까지 지역 청년·사회·민족운동을 아우르는 역할을 해 낸 장소다. 비록 멸실돼 다른 용도 건물이 들어섰으나 이를 기억하려는 지역사회 활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양산지역 사회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옛 청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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