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넘게 유공자 인정 안 된 애국지사…천수 누린 친일 앞잡이 '대한민국의 속살'

4·19혁명 55주년이다. 올해는 해방 70주년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아라이 겐기치(新井源吉)'라는 아주 악질 헌병보조원이 있었다. 부산헌병대에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다 악랄한 고문을 자행하기로 유명했다. 해방 직후 반민특위 조사기록 중 한 대목이다.

"곤봉, 죽봉, 죽검 등으로 난타하고 2, 3일간 굶기거나 잠을 재우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화로를 머리 위에 들고 있게 하고, 두레박줄에 묶어 깊은 우물 속에 담그거나 이른 아침에 방화용 수조의 꽁꽁 언 물을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깬 후 결박한 채로 얼음물에 앉히고는 머리부터 빙수를 내리붓고는 거꾸로 매달아 전신을 얼음 굴에 처박곤 했습니다. 이로써 실신하면 부채질이나 발로 차거나 불로 지지는 등….(하략)"

그러나 이승만의 조직적인 방해로 반민특위는 해체됐고, 그는 대한민국의 경찰이 됐다. 그의 원래 이름은 박종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으로 근무하던 그는 1960년 3월 15일 시위대를 향해 직격최루탄을 발사했고, 그중 한 발이 마산상고 신입생 김주열의 눈을 관통했다. 지름 5㎝, 길이 20cm에 달하는 미제 최루탄이 오른쪽 눈에 박힌 참혹한 시신을 본 그는 지프에 김주열을 싣고 바닷가로 갔다. 그리곤 시신에 돌멩이를 매달아 바다에 던졌다.

그러나 이 시신은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에 떠올랐고, 사진은 AP통신을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됐다. 시민의 분노는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오야마 에이치(大山榮一)'라는 일본 경찰도 있었다. 1932년 순사부터 시작, 1945년 해방 당시 경부보로 승진할 정도로 뼛속 깊이 일제 경찰이었다. 한국 이름은 최남규. 해방 후 대한민국 경찰이 된 그는 경부, 경감, 총경을 거쳐 경무관으로 승진했고, 1960년 3·15의거 당시 경남경찰국장이었다. 그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군중을 용공으로 몰았고 고문경관을 감쌌다. 또한 시민이 총에 맞아 숨진 데 대해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는데 군중이 던진 돌멩이와 총알이 '키스'하여 되돌아와 군중의 뒤통수에 맞았다"는 당구의 '쓰리쿠션' 원리를 강변했다.

박종표는 혁명 이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을 받고 풀려나 부산에서 살다 죽었고, 최남규는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풀려나 서울대병원에서 간장염으로 죽었다. 형을 살긴 했으나 둘 다 나름 천수를 누린 것이다.

반면 독립운동가의 삶은 어땠을까? 창원 상남면 출신 안용봉 선생은 노동조합을 통한 독립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제 감옥에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마산 진전면 출신 이교영 선생도 그랬다. 1919년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일제에 의해 태형 90대를 받았던 그 또한 한국전쟁 당시 '곡안리 재실 민간인학살' 사건으로 미군의 총탄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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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애국지사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했다. 경남도민일보의 끈질긴 발굴, 입증보도와 유족의 노력에 의해 2006년에야 건국포장과 대통령표창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 지역 역사 인물 네 명의 예를 들었지만, 전국에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로 많다. 이게 대한민국의 민얼굴이다. 억울하게 학살된 애국지사님들께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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