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17) 김종락 경남체육회 근대5종 감독

한 종목만 집중적으로 파고들어도 정상으로 가는 길은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섯 개의 종목을 동시에 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수영과 펜싱, 수영, 승마, 크로스컨트리 등 5개 종목을 경쟁하는 근대5종은 스포츠의 백미로 손꼽힌다.

근대올림픽 창시자인 쿠베르탱 남작은 근대5종을 '완성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힘을 길러주는 종목'으로 칭했다.

경남체육회 근대5종 김종락(47) 감독은 경남 근대5종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통한다. 고교 2학년 때 첫 태극마크를 단 그는 만 40세이던 지난 2009년까지 선수생활을 했다. 그가 작성한 40세 선수 기록은 아직도 한국 근대5종에서 깨지지 않는 최고령 선수기록으로 남아있다.

창녕이 고향인 김 감독은 중학교 때 수영 선수로 활약했다. 경남체고로 진학한 1986년 근대3종(수영, 육상, 사격)을 처음 접했다. 육상과 사격은 그동안 해본 적 없는 생소한 종목이었지만, 그는 시범 종목으로 치러진 전국소년체전에 출전해 메달을 목에 걸며 두각을 나타냈다.

김종락 감독이 작성한 40세 선수 기록은 아직도 한국 근대5종에서 깨지지 않는 최고령 선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이후 각종 대회에서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김 감독은 고교 2학년 때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발탁됐고, 3학년 때는 정식 태극마크도 달았다. 그는 한국체대 졸업 때까지 근대5종 국가대표로 뛰며 제3회 아시아 근대5종 선수권대회, 제1회 범태평양 근대5종 선수권대회 등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고교 시절까지 3종 경기만 하던 그는 대학 진학 이후 5종에 포함된 승마를 처음 배웠다.

국제 대회에 출전하려면 승마와 펜싱도 필요했던 것.

그는 "고교 시절엔 잘 뛰고 수영만 잘하면 메달을 딸 수 있었는데, 대표팀에 뽑히면서 승마도 배워야 했다. 처음 올라탄 말이 어찌나 무서운지 연습 도중 낙마도 숱하게 경험했다"고 말했다.

이후 승마도 안정적으로 배워 아시아 무대까지 진출했지만, 그에게도 기억하기조차 싫은 악재도 있었다. 대학 선수로 뛰면서 수영 경기 도중 그는 폐가 찢어지는 심각한 부상을 경험했고, 병원에서도 선수 생활을 만류했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기조차 어려울 만큼 고통이 찾아왔지만, 그는 보란 듯 재활에 매달렸다.

김 감독은 "폐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릎수술까지 하면서 선수 생활에 큰 위기가 닥쳤다. 하지만, 그때는 운동에 대한 열의가 커 재활에 매진했고 결국 퇴원 일주일 만에 출전한 대회에서 개인 최고기록을 세웠다"고 말했다.

큰 부상을 경험한 그는 그때 이후로 몸 관리에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성적으로 몸값이 매겨지는 운동선수에겐 몸이 자산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적인 이유로 술과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이후로는 더 술을 멀리하게 됐다. 태어나 지금껏 마신 술이 1상자도 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웃었다.

김 감독은 지난 2009년 12월 31일 부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1984년 영산중 2학년 때 수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지 꼬박 25년 만이었다.

그는 "당시 경남체고에 코치 자리가 비어 있어 선수가 아닌 코치로 직업을 바꿨지만, 당시 몸 상태로는 2년 정도는 더 선수로 뛸 수도 있었다"면서 "40세라는 최고령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데는 가족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큰 밑바탕이 됐다"고 설명했다.

대학 졸업 이후 이른 결혼을 한 그에게는 21살이 된 딸이 있다. 김 감독의 딸도 경남체고에서 사격 선수생활을 할 만큼 운동 신경이 남달랐다. 그는 "경남체고 후배가 된 딸이 자랑스러웠다. 지금은 비록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운동을 하면서 배운 선후배 관계나 예의범절이 사회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36살 때 무릎 연골 부상으로 전국체전을 망친 적이 있다. 주위에서도 '이제는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은퇴를 종용했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선수 생활을 끝낼 수 없다며 1년만 더 기회를 요구했다. 당시 4000만 원에 가깝던 연봉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금액으로 뚝 떨어져 1800만 원에 계약을 맺었다.

그는 "한 날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갔는데, 아내가 쌀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어찌나 서글픈지 눈물이 났다. 그 길로 죽기 살기로 운동에 더 매달린 게 마흔 살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이듬해 체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 다행히 연봉은 원상 복구되긴 했지만, 당시 '불안감'을 많이 느꼈다고 했다.

그는 은퇴 이후 2010년 경남체고에서 처음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김 감독은 지난 2013년 당시 체전에서 처음으로 정식종목에 진입한 여자일반부 근대4종 우승을 일궈냈다.

전국체전 첫 번째 금메달을 일궈내며 체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김 감독은 "한 가지 종목도 쉽지 않은데 4개 종목을 고루 잘하기는 더욱더 어려운 일"이라며 "힘든 훈련을 묵묵히 이겨낸 결과를 금메달로 보상받지 않았나 싶다"고 제자들을 칭찬했다.

김 감독은 2014년부터 경남체육회 감독으로 정식 임용됐다. 선수 시절 보여준 성실함과 경남체고 코치로 금메달을 따낸 성과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그는 선수들에게 항상 '욕심'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이기적인 플레이는 용납하지 않는다. 김 감독은 "운동이라는 게 참 처절하다. 선수가 욕심을 부리지 않고 훈련하다 보면 나태해지기 마련이고 그렇다 보면 곧바로 도태하는 게 현실"이라며 "감독이자 운동 선배로서 제자들에게 운동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하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흔 살까지 산전수전을 겪으며 선수생활을 했던 그가 전한 조언에는 경험에서 우러난 진솔함이 진하게 묻어났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