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많이 어리니 어디 멀리 나들이를 나서기가 쉽지 않다. 기껏해야 밥 사먹고 동네 강변 드라이브 하기 정도가 호사라면 호사랄까. 임신했을 때만 해도 남편과 함께 밖에 잠깐 물건 사러 나왔다가 필 꽂혀서는 거제 바다며, 밀양 전통시장까지 '급 왕림'하곤 했던 시절이 눈물겹게 그립다. 몇 년 지나 아이만 크면 얼마든지 다시 되찾을 수 있을 우리들의 소박한 일상이건만 창살 없는 감옥 속 같은 지금 현실이 못내 답답한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아이로 인해 얻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도 벌써 아랑곳하지 않은 나의 모습, 참 이를 데 없이 어리석은 욕심꾸러기에 간사하기 짝이 없는 기억 상실자라고나 할까.

어느덧 벚꽃도 멍하니 흐드러지고 개나리도 앙큼한 싹을 쫑긋한다. 봄바람은 올해 봄도 오래된 미래처럼 어김없이 찾아와 갈팡질팡 변덕스런 나를 다독인다. 이번 봄에도 난 불가피하다. 또 싱숭생숭하다. 결혼하고 아줌마가 되면 또 아이가 있고 생활이 바쁘게 되면 증발해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했던 그 감각과 감정이 지금의 나를 다시 조롱한다. 졌다. 반찬 가게를 나오는데 눈부신 달빛 벚꽃이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본다. 그러는 가운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앗싸!' 강제적인 봄나들이 기회가 왔다. 고향에서 이모부 칠순 잔치가 있단다. 결혼 후 집안 행사마다 필 참석을 요하는 친정엄마의 강력한 소환명령이다. 꼭 가야한다. 안 그러면 몇 달이 괴롭다. 진짜 힘들다.

칠순 잔치가 열리는 곳은 진주 남강 변의 한 음식점이었다. 사실 그곳은 그렇게 가볍게 말해버리고 말기엔 감당하기 쉽지 않은 기운이 서려있는 곳이다. 단언컨대 남강 변은, 특히 그 음식점을 접한 쪽 남강 변은 내가 알기론 진주 시가지에서 가장 운치 있고 느낌 있는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나이가 들어도 결코 고향에 자리 잡고 싶지는 않으나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한다면 그곳을 택하는 걸로 위안 삼겠다. 그 공간은 나를 자꾸 걷게 하니까, 자꾸 먹게 하고 자꾸 소곤대게 하는 곳이니까. 그러니까 그곳은 살게 하는 곳이니까.

칠순 잔치는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스케줄로 흘러가고 있었다. 뷔페 음식 나눠먹고 마이크 연설 끝 몇 장의 기념사진들을 꽝꽝 박아대고는 마지막 뒤풀이는 밴드 불러 가족 노래방이다. 그래도 좋았다. 오랜만에 조금씩 늙어가는 사촌들 얼굴 보는 것도 좋았고, 그들 곁에 개나리처럼 풋풋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는 맛도 뿌듯했다. 남편과 나는 잔치 중간에 잠시 빠져나와 골목을 걸었다. 근처 헌책방에 들르자는 남편에 혹해 따라나선 것이다. 연고도 없는 남편은 익숙하게 길을 잘 찾았다. 이 동네를 LP사러 몇 번 왔었단다. 아트록 마니아인 남편에게 전국의 헌책방은 동네 놀이터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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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이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처럼 포근하다. 느닷없는 이 봄나들이, 아 정말 날 자꾸만 걷게 하고 먹게 하고 그러니까 살게 한다.

/서은주(양산 범어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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