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16) 정순조 경남체고 펜싱 코치

과거 진주는 한국 펜싱 에페 종목의 산실이었다. 진주기계공고 출신이 에페 종목에서 대거 국가대표로 활약했고, 지금도 에페 지도자 중 30% 이상이 이 학교 출신이기 때문이다.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 지역에서 에페 종목에 관심을 두면서 무게 중심은 진주에서 수도권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지난 2008년 경남체고에 펜싱부가 창단하면서 진주는 다시 '에페명가'의 자존심을 되찾는 분위기다.

올해로 창단 8년 차를 맞은 경남체고는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최상위권의 전력을 갖췄다.

펜싱계에서는 고교 펜싱의 4강으로 경남체고와 서울체고, 광주체고, 경기 불곡고를 꼽는 데 주저함이 없을 정도다. 경남체고가 창단 8년 만에 전국 무대를 석권할 수 있었던 데는 정순조(41) 코치의 역할이 컸다.

국가대표 출신으로 창단 때부터 경남체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정 코치는 한국 펜싱 최연소 국가대표인 박상영(한국체대)을 길러내며 명장으로서의 이미지를 서서히 각인 중이다.

◇진주 출신 대표적인 펜싱 지도자 = "하필이면 성적이 좋지 않을 때 이런 인터뷰를 하게 돼 괜히 부담스럽네요."

정 코치는 지난해 전국체전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최근 몇 년간 전국체전 메달을 독식하다시피 한 경남체고이지만 지난해 제주에서 열린 체전에서는 노메달의 수모를 겪었다.

지난해 경남체고 노메달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에이스 역할을 했던 박상영이 인천아시안게임 출전 관계로 체전 40여 일 앞두고 태릉선수촌에 입촌해 전력에 누수가 생겼던 것.

박상영은 대표팀 막내로 아시안게임에 나가 단체전 금메달에 힘을 보탰지만, 결국 전국체전에는 일반부로 출전해 팀에는 보탬이 되지 못했다.

정 코치는 "박상영이라는 걸출한 선수가 있었기에 그동안 좋은 성적을 냈는데, 상영이가 빠지면서 우리 팀을 객관적으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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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펜싱 최연소 국가대표인 박상영을 길러낸 정순조 경남체고 코치 /김구연 기자 sajin@

정 코치는 진주 출신의 대표적인 펜싱 지도자다. 진주기공을 졸업하고 한체대-상무를 거쳐 익산시청에서 7년, 경남체육회에서 2년간 선수로 뛰고 34살의 나이에 은퇴했다.

고등부와 대학부 시절에는 청소년대표로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출전한 바 있고, 전성기의 끝자락이던 30살 때는 태릉선수촌에 입촌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하아시안게임 최종선발전에서 낙마하면서 그는 태극마크를 내려놓고 말았다.

◇아내와 같이 박상영 스타로 키워내 = 정 코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바로 박상영이다.

중학교 때부터 소년체전에서 금메달을 독식했던 박상영은 고교 2학년 때 출전한 2013년 인천아시안게임 펜싱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당시 국가대표 에이스 권영준을 잡아내며 '최연소 국가대표' 타이틀을 따냈다.

그는 "상영이는 특출난 선수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학교 2학년 때 다소 늦게 검을 잡았지만 성장 속도가 가파르다고 판단해 스카우트를 했다"면서 "다른 선수보다 펜싱을 좋아하고 더 성실했고, 또 치밀했다. 지도자의 역량도 분명 있었겠지만 결국 선수 개인이 펜싱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스타 선수로 크지 않았나 싶다"고 전했다.

주위에서는 박상영의 발굴을 정 코치의 지도력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는 이런 주위 반응에 대해 손사래를 쳤다.

그는 살짝 박상영의 중학교 스승인 현희 진주 제일중 코치를 언급했다. "아무래도 첫 지도자가 제일 중요하죠. 펜싱을 전혀 모르는 학생을 선수로 키워냈으니 말이죠."

박상영을 처음 펜싱의 길로 인도한 중학교 현희(진주 제일중) 코치는 펜싱계에서 이미 유명인사다. 에페 종목에서 남자 선수를 지도하는 최초의 여자 지도자이기도 한 현 코치는 정 코치의 아내이기도 하다.

"소년체전에 상영이가 출전할 때 처음 봤어요. 저희 부부는 합숙훈련을 집에서 하거든요. 집에서 상대팀 전력을 비디오로 분석하고 팀 미팅도 진행하는데 그때 상영이가 눈에 띄더라고요."

그렇게 처음 인연을 맺은 박상영과 정 코치는 경남체고에서 함께하게 됐다. 정 코치와 만난 박상영은 날개를 달았다. 고등부 1년 시절이던 2011년 대통령배펜싱대회, 전국남녀에페선수권에서 3위를 기록하면서 실업팀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에이스의 등장과 함께 경남체고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경남체고의 성장은 박상영의 등장뿐 아니라 연계육성이 잘 됐기에 가능했다. 현 코치의 진주제일중뿐 아니라 한국국제대, 경남체육회까지 선수들이 일괄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선수들에게 심리적인 부분 강조 … 3학년 정재원에 기대 = 그렇다면 정 코치는 어떤 방식으로 선수들을 지도하는 걸까? 정 코치는 검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정 코치는 "펜싱 검은 쇠로 만들어져 몸에 생채기를 내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통증을 준다. 특히 목에 펜싱 검이 걸리면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아파 몸이 위축되고 경기를 망쳐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진짜 칼이라고 생각하고 훈련하라고 한다. 심리적인 부분이 펜싱에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작은 차이가 큰 결과물을 낳기도 한다. 기술적인 부분은 고1이나 고3이나 큰 차이가 없지만 심리적으로 위축되면 그 기술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 전했다.

선수들에게 심리적인 부분을 크게 강조하는 그도 선수 시절 시쳇말로 '멘탈붕괴'로 경기를 망친 적이 많다. 충분히 겨뤄볼 만한 상대지만 상대 페이스에 끌려다니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호구를 벗은 적이 많기에 제자들은 스승의 이 부분은 닮지 않기를 바라며 지도하는 것이다.

정 코치가 '제2의 박상영'으로 기대하는 선수는 정재원(경남체고 3년). 정재원은 중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개인전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다. 신체 조건도 185㎝로 뛰어나고 공·수 전환이 빠르고 펜싱 센스가 발군이다. 정 코치는 정재원이 대학에서 실력을 조금만 더 가다듬는다면 국가대표 승선도 가능하리라 본다.

◇"지역 선수들 한데 모여 훈련할 공간 있었으면" = 지도자로서 팀이 승승장구하는 덕에 고민이 없을 것 같은 그에게도 제자들의 진학문제는 고민이다.

"펜싱팀을 운영하는 대학이 5개가 전부예요. 전국 각지에서 좋은 선수들이 성장하고, 개인전에서 우승을 하더라도 선수들이 진학하지 못해 꿈을 포기하게 될 때가 많죠. 경남체고도 우수한 선수들이 성장함에도 진학을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죠."

또 하나는 지역 선수들이 한데 모여 훈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한다는 거다.

그는 "지금의 좋은 흐름을 이어가 전국체전이나 각종 대회에서 꾸준한 성적을 내려면 선수들끼리 자주 교류를 해야 한다고 본다. 한계나 맹점은 어느 종목이나 있겠지만 진주에서 연계육성이 잘 이뤄지고 있는데 이를 더 확장할 수 있는 훈련장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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