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6) 하동지역 의병운동

하동은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영호남 세력권의 융화지역이며 경제·문화 교류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지리산과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충청도와 전라도에 인접해 있어 두 지역 의병들과 연계 속에 활발한 의병활동이 펼쳐졌다. 충청도나 전라도 의병항쟁이 농민과 결합한 봉기가 많았던데 반해 이 지역은 험준한 산악을 배경으로 기습을 하는 유격전이 활발했던 것이 특징이다. 항일독립운동 역사를 기억하는데 있어서도 '융화'라는 지리적 특색이 잘 드러난다.

◇서부 경남 후기 항일의병 투쟁 중심 = 하동지역을 무대로 한 의병은 1907년 일본이 한 군대 해산 이후 들불처럼 번진 후기 의병이다.

1895년(을미년) 단발령과 을미사변에 분노해 유생과 관군들이 들고일어난 위정척사계열 전기 의병과는 차이가 있다. 후기 의병은 을사늑약 이후 빼앗긴 국권을 일본에게서 되찾기 위한 적극적인 무장투쟁이었다. 전투 수와 격렬함, 사상자 수가 전기 의병을 훨씬 능가한다.

이 당시 하동은 전역이 의병 본거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산악 지형을 가진 화개, 악양, 옥종, 청암지역이 대표적이었다.

이 중에도 화개면 범왕리 칠불사는 김용구 의병장을 비롯한 서부 경남 의병부대에 주요한 활동 근거지였다. 1907년에는 고광순 의병부대 등이 이곳 주변에서 일본군과 대치해 교전을 벌였다. 이듬해 2월 3일에도 김동순 의병부대 일부가 칠불사와 쌍계사 방면에 출몰한다는 소식을 들은 구례와 남원 등지에서 파견된 일본 순사토벌대가 출동하는 등 의병전투에 관한 각종 기록이 남아 있다. 화개면 대산리 의신마을은 1908년 1월 말 거창 의병 50여 명이 음력 설을 지내려 왔다가 2월 2일 토벌에 나선 함양수비대의 지리산 토벌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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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 경남 의병부대 활동의 근거지였던 칠불사.

일제는 군경합동토벌작전으로 이곳 주둔 의병을 공격했는데 이때 의병 15~20명이 사망하고 1명이 포로로 잡혔다. 또한 같은 달 3일부터 5일, 7일부터 11일까지 일제가 의병토벌 작전을 벌여 수많은 의병 사상자가 나왔다. 이때 주민들이 의병들 시신을 수습해 산기슭에 매장했다.

칠불사에는 의병운동 관련 현황과 표지를 찾아볼 수 없으나 의신마을에는 의병 무덤 인근에 관련 표지가 세워져 있다.

하동은 의병 격전지답게 이곳 출신 의병 활동도 두드러졌다. 의병장으로는 박매지와 임봉구, 이성로, 우수보, 김의홍, 조기섭, 손몽상, 박홍지, 이백응, 김대수, 양문칠, 신석원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주로 지리산 주변에서 활동한 의병들로 옥종 출신 양문칠 의병장은 진주 수곡면 유명국 의병장과 비밀연락망을 두고 일본군을 위협했다.

악양의 박매지, 임봉구 등은 1907년 8월 전남 구례 연곡사에 근거를 둔 고광순 의병 부대에 합류했다. 고광순 의병부대는 화개장터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10월 14일 하동경무서를 습격했다. 칠불사 교전은 하동경무서 습격 3일 뒤에 있었다.

이후 독자 활동을 시작한 하동 의병은 하동과 산청, 함양 등을 넘나들며 일본군경과 수차례 교전을 벌였다.

박매지와 임봉구는 그해 12월 함양 출신 권석도, 우수보 등 300여 명 의병과 함께 악양면 정서리 신금벌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일본군 수십 명을 죽였다. 이후 박매지 의병대는 하동수비대를 습격하고 일진회원을 처단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의병들 귀순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던 하동군수 이승두를 습격하는가 하면 진주형무소 폭파를 위해 진주로 잠입하기도 했다.

임봉구는 의병 10여 명과 함께 양보면 일어학교(일신학교)를 방화해 전소시켰다. 이후 횡천면으로 가 일진회원 장재수를 사살하기도 했다.

이성로는 의병 40명과 함께 일진회원 김성신을 사살하고 친일파 집 6동을 불태웠고, 우수보는 의병 26명과 일본인 첩자, 일본군 18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이 밖에 수많은 의병장들이 하동 지리산 일대를 누비며 일본을 상대로 국권회복을 위한 강력한 투쟁을 벌였다.

지리산 일대 의병운동 연구에 매진해 온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소장은 "의병운동 전 과정을 놓고 봤을 때 이 같은 의병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하면서 하동지역 반일투쟁을 더욱 고양시키고, 더 나아가 일제시기 민족해방운동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지리산 의병 모두를 기억하다 = 하동은 전역에 걸쳐 의병운동이 활발했기에 일일이 현장을 찾아 기억의 흔적을 남기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또한 이곳 의병운동은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 의병과 연계 속에 이뤄졌다. 전투도 험준한 지리산 자락을 이용해 경상남도 서부, 전라, 충청을 넘나들며 게릴라 식으로 벌어졌다.

하동이라고 해서 하동 출신 의병만 기억하기에는 의병운동의 규모와 심연이 넓고 깊다. 항일의병운동을 기억하려 한 하동의 방법은 '융화'였다.

악양면 정서리 취간림에 세워진 지리산 항일투사 기념탑은 '융화된 기억'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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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 악양 취간림 내 지리산 항일투사 기념탑. /김구연 기자

이곳은 1908년 1월 박매지가 이끄는 의병대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현장이다. 박매지 의병대가 전투 이후 이곳에 진지를 설치하자 일본군 수비대가 밀정을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습격을 한 장소다. 의병 300여 명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다 80명이 전사한 구국의 애환이 서린 장소인 것이다.

이곳 주민들은 물론 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이곳은 항일독립운동 역사를 기억하기에도 최적의 장소다. 하동이라는 지역색을 떠나 전국적인 항일의거로서 의병운동을 바라보기에도 안성맞춤인 셈이다.

지난 2008년 건립된 이 기념탑은 이에 1907년부터 1915년까지 지리산 일대에서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인 전국 1만 무명 항일의병과 행적이 뚜렷한 하동 출신 의병 13명을 기리고 있다.

이 기념탑 건립을 주도한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나라사랑은 모두 함께하는 것인데 이곳이 하동이라고 하동지역 의병만 헌정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라는 점에서 영호남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약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을 모두 이곳에 기록으로 남겨둔 것"이라면서 "경건한 마음가짐보다 남녀노소 누구나 이 비를 보고 만지며 역사를 느낄 수 있도록 숭상을 위한 계단과 턱을 없애고 지면과 맞닿도록 설계했다"고 밝혔다.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이 지리산 항일투사 기념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기념탑 왼쪽에는 일본군 위안부로 한 많은 삶을 살아간 고 정서운 할머니를 추모하는 평화의 탑이, 오른쪽에는 한국전쟁이 일깨워 준 전쟁의 폭력성을 되새기게 하는 민주, 자유, 평화의 상이 함께 서 있어 아픈 역사를 일깨운다. 이는 도내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 역사를 기억하는 모범 사례로 손꼽힐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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