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료품에도 세금 차등 부과…상대적 빈곤층 배려 '치밀'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어디를 가건 먹고사는 게 문제라 도착하자마자 집 근처의 슈퍼에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이 토요일이고 밤이었는데도 슈퍼는 열려 있었다.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약 25년 전 브레멘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할 당시엔 토요일 오전까지만 슈퍼가 문을 열었다. 그래서 깜박 장을 볼 시간을 놓치면 주말에 제대로 식사를 하기가 곤란했다. 하다못해 곡물 빵이라도 없으면 쫄쫄 굶거나 부엌 구석에 잘 숨겨둔 라면으로 때워야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제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쉬지 않고 문을 열 뿐 아니라 (가게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도 문을 열어 놓고 있으니, 참 신기하기도 하고 독일이 많이 변했다 싶기도 하다. (심지어 매월 첫째 일요일은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문을 연다.)

1980년대 이후로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주창된 신자유주의 분위기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무역 등 분야와 영역을 가리지 않고 우리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인권, 노동, 환경, 공동체 등을 부차화하고 돈벌이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슈퍼를 비롯한 가게들의 개장 시간을 엄격히 규제하던 예전의 관행은 소비자 친화적이지도 않고 고용 친화적이지도 않다는 게 그 배경 논리였다. 문 여는 시간이 길면 당연히 소비자는 아무 때나 장을 볼 수 있어 좋고, 게다가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도 더 많이 필요할 터이니 고용도 늘어나서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은 그렇게 문을 오래 열다 보니 소비자로 불리는 일반 직장인들의 초과노동이 많아졌다. 게다가 슈퍼마켓 노동자의 불안정·비정규 노동을 확산하는 데도 일조했다. 결론은 슈퍼마켓 자본에 보다 큰 이득을 안겨다준 것이다.

다음으로 놀란 것은, 이런저런 식료품 같은 걸 산 뒤 찬찬히 들여다본 영수증이었다. 영수증의 물품 가격 오른쪽에 어떤 것은 A, 어떤 것은 B라고 되어 있었다. 세금이 두 종류로 표시된 것이었다. 즉, A라고 표시된 물품의 소비세 또는 부가가치세는 19%이고, B 물품의 부가세는 7%라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모든 물품에 일괄적으로 10%의 부가세가 붙는다. 그런데 독일은 번거롭게 두 가지로 나누고 있었다. 왜 그런가?

세금이 19%나 붙은 A 물품은 일례로 고구마, 두유, 맥주 등이었고, 세금이 7%밖에 붙지 않은 B 물품은 감자, 사과, 요구르트, 뮈슬리(곡물 말린 것) 등이었다. 말하자면, 먹고사는 데 기본인 식료품 중에서도 '필수' 식료품이라 할 수 있는 건 세금이 조금 붙고, '선택' 식료품이라 할 수 있는 건 세금이 두 배 이상 붙은 것이다. 식료품도 필수와 선택으로 나눠 세금을 달리 매긴 독일 사회가 이 정도로 치밀하다는 점에 또 한 번 놀랐다.

한편, 이 부분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실업자, 비정규직, 학생, 독신자, 홀로 아기 키우는 사람, 노인, 이주민 등과 같이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도 '필수' 식료품 중심으로 식탁을 꾸리면 보다 적은 돈으로도 먹고사는 데 별 지장이 없게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세금 이외에 월세보조금, 공공 보육, 육아 보조금, 무상교육, 의료보험, 환자간호, 노령연금 등 사회보장 제도가 큰 역할을 한다.)

여기 독일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슨 고기를 거창하게 구워먹거나 옷을 명품으로 걸치고 집을 화려하게 꾸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살림살이는 소박하게 꾸리되 신문이나 책을 읽거나 공원을 산책하는 것, 또 음악을 즐기고 꽃을 가꾸는 것, 친구들과 어울리고 작은 소모임 등에 참여하는 것, 이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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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비하면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 중북부 유럽의 날씨는 우중충한 날이 참 많다. (다른 건 몰라도 날씨 하나는 한국이 자랑할 만하다.) 그래서 그런지 맑은 햇살만 비치면 이곳 사람들은 공원이나 호수 변으로 몰려나가고, 그 기회를 틈타 가난한 악사들 두세 명이 트럼펫을 불어 젖히며 동전 한 푼 달라고 온 동네를 시끄럽게(?) 돌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 몇 푼 받는 동전엔 세금이 하나도 붙지 않는다. 그들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아마도 동네 슈퍼에선 B급 세금이 붙는 필수 식료품들이 이 가난뱅이 악사들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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