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필 씨, 용접·새시 등 고향 위해 여러 우물 파는 '맥가이버'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라는 옛말이 있다. 또 '재주가 많으면 굶어 죽는다'라는 말도 속담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일을 너무 벌여 놓거나 하던 일을 자주 바꾸어 하면 아무런 성과가 없으니 어떠한 일이든 한 가지 일을 끝까지 하여야 성공할 수 있다는 옛사람 경험의 산물이다. 그러나 여기 선현의 말씀을 뒤로하고 살아가는 이가 있다.

"촌에서 농사 말고 직업을 가지려면 팔방미인이 돼야 합니다. 창문 수리 할 수 있으면 화장실 변기도 고칠 줄 알아야 하고 전기 패넬로 난방공사 할 수 있으면 벌목으로 땔감도 할 줄 알아 야해요. 촌에 어르신들 요구 사항이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자기가 전문이라고 한 가지만 하면 굶기 안성맞춤이죠."

고성군 동해면 양촌리 덕곡마을 '김 반장'으로 통하는 김상필(48) 씨는 한 우물이 아닌 여러 우물을 판다. 그에게서 받은 명함 앞면에는 '알루미늄 샷시', 뒷면에는 '전기난방'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외도 몇 가지의 일을 더 하고 있다. 철공소 용접, 토지 정리, 청소 대행 등 '김 반장' 김 씨의 사업 영역은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이 곧 그의 일이다.

김상필 씨가 화물 트럭에서 지인에게 얻어 온 의자를 내리고 있다.

"내가 글 쓰는 것만 못하지 웬만한 것은 다 합니다. 제가 우리 마을에선 상당히 젊은 축에 속합니다. 그러다 보니 동네 큰일 작은 일 경험하면서 그것이 곧 직업이 되는 거지요. 마을 일도 적잖이 많습니다. 동네 주민 심부름도 해야지요. 어르신들 편찮으시면 병원도 모시고 다녀야죠. 어떨 때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죠. 오직 돈벌이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김 씨의 업무는 동네 주민들 생활 방식에 맞추어 새벽 5시부터 시작된다. 요즘은 오전을 양촌리 마을에서 보내고 오후에는 마산 삼진면과 진주 이반성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어르신들 입과 입을 통해 양촌리 덕곡마을 '김 반장'이 '맥가이버'라고 소문이 나면서 그의 발걸음은 바빠졌다.

동해면 양촌리 덕곡마을은 김 씨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그는 1986년 부산 수산대 기관학과에 진학하며 고향을 떠났다. 94년 대학 졸업과 함께 '마도로스의 꿈'을 접고 제약회사에 입사했다. 대학 전공과 무관하게 시작된 사회 첫발은 오늘의 '김 반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대학 입학 당시 선박 관련 직종들이 육지에 직업군 연봉보다 2.5배 정도 더 받았어요. 당시 집 형편도 좋지 않아서 돈 좀 버는 학과로 진학했는데 94년 졸업 할 때 상선 경기가 좋지 않아서 병원과 약국에 약을 세일즈 하는 제약회사에 입사했죠. 5년 근무하고 IMF를 맞았어요. 반복되는 일상에서 이건 아니다. 세상을 넓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가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택한 것은 '이역만리 외국행'이었다. 남미 과테말라에서 원단 염색 사업을 하는 김 씨의 고종사촌이 그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안한 것. 1999년 4월, 그는 금의환향을 다짐하며 비행기에 올랐고 미국 LA를 경유 19시간 만에 만리타향 과테말라에 내렸다. 10여 년 타향살이의 시작이었다.

"31살에 새로운 모험과 꿈을 시작했죠. 사촌 공장 취업 2년 만에 스카우트 되었죠. 미국과 과테말라 간에 의류 무역 회사로 자리를 옮겼죠. 그곳에 근무하며 하늘이 주신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국땅 3년 차, 2002년 대한민국이 월드컵에 빠져 있을 때 그는 과테말라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김 씨는 그해 결혼을 했고 이듬해 아들 '민서로망후벤티노'를 얻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은 5년을 넘기지 못했다. 2007년 김 씨의 아내 '가브리엘아'는 급성 폐렴으로 그와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년이 지난 2009년 경남 고성 덕곡마을 본가에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간 경화 말기인 김 씨의 어머니가 한 달 남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았다는 것'. 그는 어머니의 마지막 길에 함께 하고 싶었다. 집 떠나 만리타향에서 성공은 못 했지만, 그의 행복했던 사랑의 결실을 어머니께 보여주고 싶었다.

"아들 민서와 함께 어머니 임종은 지켜보려고 3개월짜리 왕복 항공권으로 2009년 2월에 고향에 왔죠. 어머니는 시한부 선고받은 한 달을 넘기고 그해 7월에 돌아가셨어요. 고향에 가족이라고는 아버지와 나 그리고 아들 민서뿐이었죠. 아버지 혼자 두고 과테말라로 돌아가려 하니 발걸음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아들 민서에게도 한국인의 정체성도 심어주고 싶고요. 그래서 양촌리 덕곡마을에 눌러앉았죠."

김상필 씨가 준비 중인 간이 포장마차.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지 6년, 그곳에는 무역회사도 제약회사고 없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아들을 키우며 그는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리고 '양촌리 김 반장', '덕곡마을 김가이버'란 애칭도 얻게 됐다. 함께 온 아들 민서는 엄마의 땅에서 배운 스페인어 대신 한글과 함께하며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트럭에 의자 들 보이시죠. 옆 동네 진동에 사는 분이 포장마차 장사에 쓰라고 주신 거 에요. 작년부터 계획했는데 올봄 지나면 오픈해야죠. 이 포장마차가 또 하나의 출발점입니다."

그는 마산과 고성을 잇는 동진대교 옆 주차장에 간이 포장마차를 준비 중이다. 또 그는 무역업 경험을 살려 주방용품을 남미에 수출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 이 모두가 아들 민서를 위해서라고 했다.

"돈보다도 고향이 좋아서 닥치는 대로 일하죠. 그런데 제가 여러 우물을 파는 이유는 하나에요. 아들 민서가 고향인 과테말라에 글로벌한 사람으로 드나 다닐수 있도록 키우기 위해서죠. 그러려면 아빠가 든든한 힘이 되어야죠."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