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기술도 시장서 사장될 때 있지만…기술외적 요소, 연구의욕 꺾는 일 없어야

얼마 전 필자가 근무하는 연구소에서 수년에 걸쳐 공들여 연구한 기술이 세계 1등 기술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기술 심사가 있었다. 세계 1등 기술은 세계 최초로 발명된 기술이거나,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적 성능을 가지면서 기업에 이전이 가능한 경우 선정된다. 심사 중 "세계 1등 기술은 세계 1등 제품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저명한 교수, 기업체 전문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기술이 최고이면 제품 판매량도 우월적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심사위원과 꼭 그렇지 않다는 심사위원 간의 설전이 오갔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아무리 뛰어난 (최초, 최고)기술이라도 1등 제품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홈페이지 내용을 편리하게 보려면 웹 브라우저라는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1990년대 인터넷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초창기에 넷스케이프(Netscape)라는 웹 브라우저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인터넷 시대의 강자로 떠올랐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심각한 위협을 느꼈고, 윈도95(Windows 95) 운영체제를 내놓으면서 자체 웹 브라우저인 익스플로러(Explorer)를 함께 제공했다. 몇 년 후 윈도 98 버전에서는 아예 익스플로러를 끼워 팔기 시작했다. 윈도를 깔면 손쉽게 익스플로러를 사용할 수 있게 되다 보니, 사용자는 기술의 우월성을 차치하고 익스플로러 편의성을 선호하게 되었다. 마침내 인터넷 시대를 열어준 넷스케이프는 끼워 팔기라는 공정하지 못한 마케팅 꼼수 때문에 시장에서 사라져 갔다.

기술표준을 둘러싼 다툼에서도 1등 기술이 밀려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0년대 비디오 표준을 놓고 한판 대결을 벌였던 소니의 베타맥스와 JVC의 VHS 방식이다. 당시 소니의 베타맥스 기술이 화질 면에서 VHS보다 월등하게 우수했다. JVC는 화질은 떨어지지만, 긴 녹화시간과 저렴한 비디오테이프 가격을 장점으로 내세워 시장을 공략했다. JVC는 비디오 콘텐츠를 제공하는 영화사들을 VHS 진영으로 끌어들였고 거대한 기술 우호 세력을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VHS 방식은 비디오 기술표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기술적으로 한 수 위였던 소니 베타맥스는 기술표준을 소홀히 한 대가로 비디오 시장에서 밀려났고, 방송용 고화질 카메라 시장에서만 사용되는 신세가 되었다.

1920년대 미국에서는 가스냉장고와 전기 냉장고 간 전쟁이 20년 동안 있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대부분을 차지한 전기 냉장고가 승리했지만, 기술적으로는 가스냉장고가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가스냉장고는 가열된 암모니아의 기화열을 이용하기 때문에 전동기가 필요 없는 간단한 구조였다. 반면에 냉매를 고온·고압으로 압축하고자 전동기를 사용하는 전기 냉장고는 덩치가 크고 진동과 소음이 매우 심했다. 이러한 기술적 열세에도 전기 냉장고가 승리한 것은 대기업의 자금력과 마케팅 능력 때문이다. 당시 가스냉장고 제조는 중소기업이 주도하고 있었고, 전기 냉장고는 전기산업을 이끌어가는 GE, 웨스팅하우스와 같은 대기업이 만들었다. 전기산업을 키우려면 전기 냉장고와 같이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제품이 많아야 했다. 이에 대기업들은 전기 냉장고 성능 개선에 막대한 투자와 함께 금융을 통해 중소기업의 자금줄을 압박했다. 대기업의 횡포에 가스냉장고가 고사한 것이다.

앞서 사례에서 보듯 세계 1등 기술이 제품에 적용되었다고 높은 시장 점유로 반드시 이어지지 않는다. 기술은 그 우수성만으로 채택되고 제품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기술의 기득권, 세력을 동원한 표준화, 대기업의 자금력과 마케팅 등 기술외적인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 적어도 기술혁신은 '과학기술-사회의 상호작용'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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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세계 1등 기술이 기술외적 요소에 의해 소비자들의 많은 선택을 받지 못하더라도, 기술적 가치가 저평가되어 과학기술자의 연구 의욕마저 사그라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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