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4) 진주지역 의병운동

일제강점기 경남지역 항일독립운동은 지역별로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전에 살펴 본 진해와 같은 동남부지역은 일본인 중심 식민도시로 발전해가면서 치열한 민족 갈등과 의열투쟁 무대가 됐다. 진주, 함안, 합천 등 중서부 농업·산악지역은 의병운동, 3·1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특히 중서부 내륙 중심지인 진주는 3·1운동, 학생운동, 애국계몽운동, 청년운동, 소년운동 등 항일독립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발현됐다. 진주에서 시작한 형평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항일독립운동 역사도 도내 다른 지역보다 오래됐다.

을사늑약(1905)으로 한일병탄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을미년(1895). 민비시해사건(을미사변)으로 촉발한 전기 의병운동이 본격적인 진주지역 항일독립운동 시작으로 볼 수 있어서다.

경남 항일의병운동 중심지 진주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항일 성지 진주성에 숨은 의병 본거지 =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한 때는 1896년 초다. 척사파 계열 노응규를 의병장으로 한 진주의병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해 일어났다. 함양 안의 사람인 노응규는 장수사 승려 서재기를 선봉으로 삼아 그의 문인들과 함께 거의했다. 1896년 2월 19일 진주에 도착한 노응규 의진은 진주향교에 대기했다가 20일 새벽 진주성을 점령했다. 노응규는 진주관찰부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옛 운주헌)에 지휘소를 두고 기거했다.

선화당(宣化堂)은 지금으로 치면 도지사 집무실과 같다. 선화당은 애초 경상도 우병영 관청이던 '운주헌'으로 쓰이던 건물이다.

1913년 당시 진주성 선화당 모습.

주로 진주병사가 이곳에서 병무를 봐왔는데 1894년 병영 혁파와 함께 운주헌이 폐지됐고, 1896년 4월 13일 경상도가 남도와 북도로 나뉘어 경남관찰도라는 지방행정구역이 정해져 관찰사가 부임하면서 선화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선화당은 조선말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도청 이전으로 용도가 폐기될 때까지 30년 동안 경남도정 총본산으로 기능을 했다.

노응규 의진이 진주성을 장악하자 진주 유림은 비봉산 아래에서 별도로 의병을 조직하고 정한용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이들 진주의병은 몇 차례 관군을 격퇴하고 일본인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는 등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노응규는 한말 서부경남지역 최초이자 최대 의병운동을 이곳에서 진두지휘한 것이다. 임진왜란 3대첩 주무대로 항일정신이 오롯이 남아 있는 진주성은 한말 항일독립운동 현장으로서 그 역할을 한 것이다.

선화당 터는 영남포정사 뒤부터 경절사에 이르는 곳까지 이른다. 지난 1998년 국립진주박물관 발굴 조사 결과 터를 확인했으나 현재 멸실돼 당시 기억을 전혀 떠올릴 수 없다. 경절사 왼편에 '운주헌' 터에 대한 설명이 있으나 의병운동 관련 내용을 포함하지 않았다. 경절사 오른편에는 진주성 비석군이 있다.

진주성 내 선화당이 있던 자리. 일제강점기 일제가 현대식으로 개축해 사용하기도 했던 선화당은 옛 경상도 우병영 관청·의병주둔지·경남도청 등 사적지로서 의의가 커 복원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서부경남지역 향토사 연구에 매진한 추경화 선생은 이를 두고 "선화당 터는 진주의병 주둔지로서뿐만 아니라 이후 경남도청으로 사용되는 등 사적지로 의의가 높음에도 이를 복원하지 않은 점은 안타까울 따름이다"면서 "더구나 진주성 비석군에는 친일 인사를 기리는 비석까지 있어 임진왜란서부터 이어지는 항일 성지 진주성을 되레 욕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의병 배출 산실 낙육재 = 진주성 공북문에서 약 600m,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진주시 중안동 중앙요양병원 터. 진주의료원이 있던 이곳은 119년 전인 1896년 지역 유생들이 독서와 학술 연구를 하던 관립 서재 낙육재(樂育齋)가 세워진 자리다. 낙육재는 1791년 경상도 대구 경상감영 내 있던 것이 시초로, 유능한 유생들을 선발해 공부시킨 곳이다. 1896년 경상도가 남도와 북도로 나뉘고 경상남도 감영이 들어서면서 진주에도 낙육재가 설립됐다. 낙육재는 1년 뒤 관립진주낙육학교로 개편됐다.

낙육재(현 중앙요양병원)가 있던 자리.

낙육학교는 진주지역 교육과 의병운동 역사에 큰 축이 되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을사늑약 직후인 1905년 11월 진주지역 청년 유생들은 '동아개진교육회'(東亞改進敎育會)를 조직해 낙육학교에 모여 일제 관서 등을 습격하기로 하고 혈서로 연판장을 작성하는 등 의거를 계획했다. 그러나 12월 어느 날 밤늦은 시간 일본군 헌병대와 일본인 거류민 60명 내외가 합세해 낙육학교를 습격해 이들 유생 모임을 강제 해산시킨다. 이때 무력 충돌로 일본인 거류민은 자경단을 조직하고 폭약을 제조하는 등 유생 의병들 공격에 대비했다고 전한다.

이후 낙육학교는 1908년 폐쇄된다. 낙육학교 폐쇄 이유를 두고 재정난 등 몇몇 의견이 있는데 일본이 1907년 군대 해산 등 일련의 사건으로 낙육학교가 다시 반일구국운동 거점이 될 것을 두려워한 결과로 보는 이들이 많다. 낙육재 터는 이처럼 진주 의병운동 역사에 중요한 위치이나 현재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진주의료원이 이전하면서 한때 진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낙육재 복원 주장이 나왔지만, 결국 민간에 매각되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폐쇄 이후 낙육재 터에 세워진 진주 실업학교는 1911년 진주공립농업학교로 개칭하고 1921년 진주시 강남동으로 옮긴다. 이 터에 1923년 당시 경남 자혜의원이 이전해오고 이후 도립 진주의료원이 들어섰다.

홍순권 동아대 사학과 교수는 "현장에 사적지 안내판을 설치해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면서 "낙육재 복원 관련 시민사회 의견이 많았던 만큼 사적지 인근 혹은 기타 장소에 낙육재 복원이나 이에 준하는 기념사업이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낙육학교 폐쇄 연관된 진주진위대 = 진주진위대는 낙육재 터와 불과 500여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지금은 갤러리아백화점이 들어선 이곳에는 러시아식 신식 군대가 경상남도를 수비할 목적으로 주둔하고 있었다. 한데 일본은 1907년 군대해산령을 내렸다. 진주진위대는 무장해제를 거부했다. 일본은 마산 주둔 일본군 병력 1개 소대를 진주로 보내 경찰과 해제를 시도했다. 강제 해산을 앞두고 통감대리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두 차례 전보를 보내 무기 압수와 해산 예정일 등을 상세히 보고했다. 진주진위대 해산에 앞장선 이는 진주경무서 순사부장이던 최지환이었다. 최지환이 진주진위대 중대장 경(慶) 정위를 일본군 주둔지로 유인해 감금함으로써 남은 병사들 무장봉기를 봉쇄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진주진위대(현 갤러리아백화점)가 있던 자리.

해산당한 병사들은 스스로 의군이라 칭하며 일제 관서를 습격하고 일본인 거류민을 공격하는 등 진주 곳곳에서 의거를 일으켰다. 낙육재 폐쇄 이유가 군대 해산에서 비롯한다는 의견은 이들 해산 병사들의 의거가 이곳 학생들에게까지 미칠 것을 우려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갤러리아백화점 인근에는 그럼에도 현재 이를 기억할 만한 어떠한 역사적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적지 안내문이라도 설치해 역사교육의 장으로 삼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추경화 선생은 "이렇듯 진주가 서부경남에서 의병운동이 가장 활발했음에도 이를 기억할 만한 기념공간이 전무하다"면서 "산청에 유림독립기념관이, 함양에 노응규를 기리는 항일독립지사 사적공원이 있지만 정작 이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진주에 이렇다 할 공간과 관련 표지가 없는 것은 되돌아봐야 할 일이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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