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3) 진해지역 사회·문화운동

일찍이 제국주의적 근대에 눈을 뜬 진해지역 항일독립운동 심연은 깊고도 넓었다.

3·1독립만세운동 발로가 된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비롯해 사회주의 독립운동, 문화(종교) 운동, 애국계몽운동, 사회운동 심지어 국외 독립운동까지 진해지역과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 의해 전국에 발현됐다. 일제 말 신사참배를 거부한 항일순교자 주기철 목사, 조봉암 부인이자 경성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여성운동에 매진한 김조이, 일본에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한 배상권 등은 항일독립운동 정신을 진해에서 전국, 해외로 옮긴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개통학교와 숙명의숙을 세우고 국채보상운동에도 가담한 주기효, 3·1운동과 웅천지역 청년운동, 소작조합운동에 가담한 문석주, 진해 청년·농민·신간회 운동 등에 동분서주한 주병화 등 진해를 중심으로 활동한 항일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빼놓지 않고 기억해야 할 인물들이다.

이들이 태어나 살았고 항일독립운동 근거지로 활용한 역사적 현장 또한 진해 전역에 흩어져 있다.

◇청년운동 산실 경화동 = 일제강점기 군항이 들어서기 전만 해도 경화동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너른 터였다.

이곳에 마을이 들어선 것은 일제 군항 건설로 생업과 터전을 잃은 11개 마을의 한국인들이 이곳에 새로 정착하면서다. 이곳 주민들에게는 진해지역 뿌리 깊은 항일정신이 보다 극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만 모여 있으니 항일독립을 위한 회합도 빈번할 수밖에 없었다. 진해청년회와 진해소년회가 대표적이다.

진해구 경화동 454번지. 현재 세탁소가 들어선 단층 건물은 100년 전인 1915년 진해청년회 사무소가 있던 자리다.

이곳은 본래 1913년 군항 건설로 웅천면 원포리에서 경화동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 주병화가 대서업을 개업한 장소였다. 진해청년회는 청년단으로 창립해 1919년 진해구락부에서 1924년 진해청년회로 변경했다. 이때부터 활동 내용도 부르주아적 색채를 버리고 완전한 무산운동단으로 바꿔 활동한다.

이곳 회원들은 진해·명동·덕산·이동·석동·경화동 등 노동야학을 열고 간이도서부를 설치하는 등 일을 했다. 1920년 당시 민족지로 창간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지국도 이곳에 뒀다.

주병화는 1923년 동지를 규합해 진해소작회를 창립하고 일본인과 소작쟁의를 이끌었다. 1927년 신간회가 창립하자 창원군지부를 결성해 지회장을 맡기도 했다.

경화동 920번지. 청년회 사무소 터에서 채 500m도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는 부산 범어사 말사인 성주사가 세운 불교포교당이 자리해 있었다. 지금은 정암사(淨岩寺)가 된 이곳은 일제강점기에는 진해지역 청년운동가들이 청년회 회의와 문화행사를 하던 대표적인 장소였다.

진해청년회 사무소를 같이 쓰던 진해소년회 창립총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진해소년회는 그러나 1주일 만에 진해경찰서로부터 해산 명령을 받고 일제 감시를 피해 이곳으로 사무소를 옮기고 이름을 불교소년회로 바꿨다. 이곳 회원들은 종교 집회를 가장해 각종 행사를 열었다. 이 사실을 안 일제 경찰은 포교당 주지에게 압력을 넣어 집회를 막았다.

이곳 주민들은 그러나 자신이 선 땅, 사는 건물이 항일독립운동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단순히 일본식 건물이 많으니 역사가 오래된 동네 정도로 짐작할 뿐이다.

옛 진해청년회 사무소 터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주인도 이를 아쉬워했다. "이곳이 역사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면 좋죠. 관련 표지도 세우면 더 좋고요. 그런 의미 있는 표지를 세운다면 세탁소 건물 어느 곳이든 자리를 내어 줄 용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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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가 배출 요람 창원 = 웅천초등학교 북쪽 웅천사거리에서 웅천로를 따라 웅동 방면으로 500m를 가다보면 창원시 농업기술센터 동부지도과(진해농업기술센터)가 나온다. 이곳 시내버스 정류장 옆은 일제강점기 여성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김조이(1904~미상) 선생이 살던 집터이다.

김 선생은 웅천군 마지막 군수 김재형 손녀로 태어나 민족학교인 계광학교를 졸업했다. 서울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선생은 항일의식에 불타 1925년 1월 허정숙(허헌 딸)·주세죽(박헌영 아내) 등 경성여자청년동맹을 창립, 집행위원이 됐다. 창립 1년 동안 선생은 국제부인데이 제정과 이를 바탕으로 한 세계무산부인운동가 전기 발간 등 사업을 진행했다.

이를 위해 매주 토요일 밤 여성 해방 서적 연구와 토론, 국제부인데이와 청년데이 기념을 위한 간담회를 열었다. 자본가에 착취당하는 불쌍한 노동 부인을 위한 위안음악회도 열었다.

이후 조봉암의 노력으로 러시아 모스크바 동방노동자공산대학에서 2년 동안 유학한 뒤 귀국해 사회주의 운동에 매진했다. 1932년에는 함경남도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다 피검돼 징역 3년형을 받아 옥살이를 했다. 사상적 동지이자 동반자이던 조봉암과는 1944년 3월 29일 정식 혼인신고를 했다. 이 둘의 만남은 1939년 7월 김 선생 출옥 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후 김조이는 부녀총동맹 인천지부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선생의 집터는 그러나 현재 도로와 대나무 밭으로 변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일제강점기 여성 해방과 조국 독립을 위해 애쓴 선생의 역할에 견줘 관련 표지 하나 두지 못한 것은 반성이 필요한 지점이다.

박영주 경남대 박물관 비상임연구원은 "김조이 선생은 한국 여성학 이론을 확립하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만들어 위안부 피해 여성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마산 출신 현존 여성운동 대모 이효재(1924~) 선생에 앞서 여성 해방에 선구자적 역할을 해온 분"이라 강조하면서 "창원을 한국 여성운동가 배출 요람으로 각인시킨다는 의미로 선생 집터에 그의 업적을 담은 작은 표지를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진해지역 항일독립운동 이렇게 기억을 = 웅천읍성 동문인 견룡문 앞 너른 터. 원형으로 된 붉은 색 벽돌 건물이 경건한 자태를 드러낸다. 개관을 앞두고 한창 내부 정리 중인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다. 주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 재직 중 신사참배를 거부한 일로 징역 10년형을 받고 형무소에 수감 된 후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순교했다.

현재 기념관이 선 자리는 주 목사가 태어난 생가지와 약 2.5㎞ 떨어져 있다. 기념관 반대편 옛 웅천읍성 서문 인근에 선생이 목사의 꿈을 키운 웅천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주 목사 기념비와 함께 옛 교회 건물을 지키던 종이 있다. 인근 성내동에는 주 목사가 다닌 개통학교 후신 웅천초등학교(역사체험관)가 있다. 주기철 목사 기념관을 중심으로 주 목사 생가지와 개통학교, 웅천교회 등을 묶어 학습코스로 삼으면 좋겠다. 이와 함께 웅천 3·1운동 중심이던 웅천우시장 터(웅천읍성 견룡문)와 김조이 선생 집터를 지나 웅동 항일독립운동 현장까지 학습 동선으로 삼으면 더할 나위 없는 진해 항일독립운동 역사 기억의 장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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