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영화 주인공 보며 빠져든 말…출퇴근 때도 애용한 인생 동반자로

'위 아래 위위 아래'를 훑어봐도 모두 가죽이다. 가죽부츠, 가죽바지, 가죽잠바, 가죽모자….

속옷을 빼곤 매일 가죽을 입는 남자 김영우(60) 씨. 그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에서 '갖바치'라는 상점을 35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갖바치는 순 우리말로 가죽신을 만드는 사람이다.

과거 양반은 갖바치가 만드는 가죽신을 신었고 중인들은 닥나무나 삼을 짚신처럼 엮은 미투리를 신었다. 짚신은 주로 백성 차지였다.

김 씨는 가죽으로 신발, 가방, 허리띠 등을 만들어 판다.

그가 입은 가죽 옷도 손수 만들 만큼 솜씨가 좋다. 매장에 들어서면 난생처음 보는 제품들이 많은데 가죽에 대해 꽁꽁 닫힌 마음을 열어준다.

김 씨가 가죽에 빠진 것은 '말(馬)' 덕분이다.

"부모님이 옛 시민극장 옆 골목에서 고려피혁이라는 가죽도매업을 하셨어. 한 날은 시민극장에서 영화 <마켄나의 황금>을 봤는데 주인공인 그레고리 펙의 말 타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어. 넋을 잃고 봤지."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에서 갖바치를 운영하고 있는 김영우 씨. 그는 말을 즐겨 타고 가죽을 인생의 동반자로 여긴다. 김 씨가 자신이 만든 가죽가방을 들고 있다. / 김민지 기자

당시 17살이었던 김 씨는 말을 탈 수 있는 곳, 서울구락부를 찾았다.

서울구락부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경호했던 심동섭 씨가 운영하던 마장(馬場)으로 당시 의사 6명이 그곳에서 말 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심 선생에게 '죽어도 좋으니 말을 타게 해 달라. 말안장 위에서 죽어도 좋다'고 당돌하게 말했어. 어린 애가 말 타고 싶다고 하니 얼마나 기가 찼겠어. 심 선생님이 자신감 넘치는 내 모습을 보고 '그래, 한 번 타봐라'고 던지듯 말했고 나는 두 바퀴 타다가 말에서 떨어졌지. 6미터 정도 날아갔나?(웃음) 이튿날 깁스한 상태로 또 말을 타러 갔지."

그때 말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김 씨는 한국국제대학교에서 생활체육지도자 3급을 따 사람들에게 말 타는 방법을 가르쳤고, 그의 집(창원시 의창구 소답동)에서 일터까지 3년 동안 말을 타고 출퇴근을 했다. 말을 탈 때 필요한 장비도 직접 만든다. 이를테면 안장, 장화, 가죽옷, 모자 등.

말은 물론 가죽을 빼놓고도 그의 인생을 말할 수 없다.

"부모에 이어 형이 가죽도매업을 했고 형이 세상을 떠나면서 내가 운영을 하게 됐지. 어느 정도 장사는 됐어. 그런데 중국과 수교를 한 이후부터 싼 중국 제품이 들어오더니 판로가 없어지더라고. 가업인데 버릴 수도 없고…."

김 씨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가죽공예였다.

일본인이던 당시 마산수출자유지역 내 대표적인 시계제조업체인 한국씨티즌 사장이 그에게 "아내가 가죽공예 수업을 들을 만큼 일본에서는 가죽공예가 인기를 끌고 있으니 이 기술을 연마해봐라"고 제안을 했다.

일본인 사장은 휴가 때마다 일본에서 물 건너온 공구, 카탈로그 등을 김 씨에게 건넸다. 가죽은 그의 손을 거치면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이 됐다.

"좋은 인연들이 많이 왔다 갔지. 말을 가르쳐 준 심동섭 선생, 가죽공예에 눈을 뜨게 한 일본인 사장 그리고 호를 지어준 김화석 치과의사. 김 의사는 치과의사면서 사진작가인데 같이 사진을 찍으러 많이 다녔어. 예술의 중심이 되라며 주산(柱山)이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했지."

김대환(1929~ ), 황인학(1941-1986), 현재호(1935~2004) 등 경남 지역 화가의 작품이 심심찮게 걸려 있을 만큼 김 씨는 예술에 관심이 많다.

전문적으로 미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그림을 즐겨 그린다.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디자인과 한 땀 한 땀 장인정신으로 엮어내는 노력이 만나 세상에 하나뿐인 가죽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갖바치를 이용하는 고객은 개성이 강하거나 나만의 물건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아. 까칠한 고객이 있었기에 고객이 원하는 단 하나의 제품을 만들 수 있었지. 힘이 닿는 데까지 말을 타고 가죽공예를 하고 싶어. 그러다 보면 언젠가 동양의 루이비통이 되어 있겠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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