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오백리] (20) 진주시 남강교∼집현면 덕오교

이제는 남강 철새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경칩 지나니 왜가리 백로 청둥오리 등 텃새 몇 종만 있을 뿐 겨울 내내 남강에서 보이던, 이제는 제법 친숙해진 큰고니 독수리 비오리 등을 볼 수가 없다.

다시 남강 물길과 영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보고 있다. 남강을 가운데 두고 서쪽은 진주시 하대동과 초전동으로 이어지고 동쪽은 진주시 금산면 속사리와 송백리로 이어지고 있다. 송백리 남쪽에는 큰 나루터가 있었다. 누런 버드나무가 많아 황류진(黃柳津)이라 했다. 마을 사람들이 진주로 가던 유일한 뱃길이며 또 진주 사람들이 마산, 대구 방면으로 가는 나루터였다고 한다. '진'이라 불릴 만큼 제법 컸던 이곳 나루터에는 주막이 여러 채여서 늘 봇짐행상 등 사람들로 붐볐다. 금산면지에 따르면 이곳에서 멀잖은 곳에 진주 부자로 알려진 김기태, 홍성윤 등의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가 있다지만 옛길을 찾을 수 없어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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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이곳 나루터로 넘나들던 넌고개와 뱃고개가 있었다. 뱃고개는 서쪽으로는 진주, 동쪽으로는 진성, 반성으로 가는 고개였다. 하지만 구암나루터 자리에 잠수교(潛水橋)가 개통되자 이곳 나루터도 점점 이용을 안 하게 되었고 뱃고개 옛길도 수풀만 무성해져 그저 눈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이곳 송백양수장은 1980년대 만들어졌는데 그 이전에는 덤이(절벽) 아래 옛사람들이 아이의 태(胎)를 버리거나 용왕제를 올렸다는 방태소(沼)였다고 한다.

진주 시내권으로서는 끝자락이랄 수 있는 초전동·금산면 일대는 1995년 시·군 통합이 이뤄지기 전까지만 해도 진주시와 진양군으로 나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남강 유역은 넓은 습지와 모래밭을 이루고 있었다. 강을 따라가다 보면 남강을 가운데 두고 강 유역에 살고 있는 마을들의 변화가 금방 눈에 들어온다. 1980년대 후반까지도 초전동은 미개발 지역이었다. 농산물도매시장이 있는 근처에는 쓰레기처리장도 있어 지금과는 사뭇 다른 황량한 동네였다. 박정호(45) 씨는 "1980년 무렵 지금 종합실내체육관과 장례식장 있는 데가 순전히 모래밭이었는데 학교 소풍 때면 어김없이 그곳으로 갔다"고 말한다.

'금산잠수교' 그리고 1985년 소몰이 시위

현 금산교에 닿기 직전 구암나루터가 있었다. 잠수교가 있던 자리이다. '금산 잠수교'로 더 알려져 있는 구암잠수교는 1936년(병자년) 대홍수 직후 놓았는데, 또 홍수가 나면 물이 다리 위를 넘어가도록 낮게 가설했다는 뜻에서 잠수교가 되었다. 그러나 남강댐 준공으로 물에 잠기는 일은 없었다 한다. 길이 370m, 폭 6m 시멘트 다리였는데 금산면과 진주시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였다. 1998년 현 위치에 금산교가 생기면서 없어졌다. 금산배수장 근처에 가면 당시 금산교가설추진위원장이었던 정기영의 공을 치하하는 승공비가 있다. 그리고 옛 구암나루터 주변은 수변산책로가 새로이 조성돼 있다.

옛 나루터가 있던 자리. 금산면 중천리로 이어지는 금산교가 보인다.

진주시내로 진입하는 관문이었던 이 금산 잠수교에 얽힌 이야기가 참 많지만 그중에서 1980년대 전반 일어났던 일은 진주지역 농민운동사에서 새겨둘 만하다.

1980년대 초반 금산면 가방리 관방마을은 진주농민운동의 거점이었다. 아직 진양군 시절이었다. 관방마을 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농민회 진양협의회는 이후 경남지역 농민운동 역사상 최초의 가장 큰 투쟁으로 꼽히는 수세현물자진납부투쟁, 불량종자 피망 사건, 소몰이 시위 등 대대적인 농민시위를 주도해나갔다.

"소를 몰고 나온 농민들과 경찰이 금산다리에서 대치, 나중에는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경찰과 농민이 서로 끌어안은 채 강바닥에 내동댕이쳐 뼈가 부러진 사람까지 있었으며, 10여 명이 경찰서까지 연행돼 심한 구타를 당했습니다."

1985년 7월 소몰이시위 투쟁 때였다. 이 증언은 기자가 2007년 6월항쟁 20주년 기획기사를 쓰면서 정현찬(전 전국농민회 의장) 씨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소몰이 시위는 전두환 동생 전경환이 호주산 소를 대대적으로 수입해오는 바람에 소값이 폭락해 농민들이 궐기한 사건이었다. 당시는 진양군(1995년 진주시 편입)이었던 금산면 관방마을을 중심으로 한 진양군협의회의 소몰이 시위는 가농소식지인 '농민의 소리'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1985년 7월 18일 가톨릭농민회 경남진양협의회 회원과 농민 100여명이 경운기 5대를 몰고 소값 피해보상과 농가부채 탕감 등을 외치며 당시 출동한 경찰들과 진양협의회 농민들이 금산 잠수교에서 팽팽하게 대치한 장면과 시위대가 이 다리를 건너 시내로 진입하는 장면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기자가 썼던 <진주신문> 2007년 기획기사 '6월항쟁 20주년'에서

이 과정에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화도 있다. 당시 시위참가자 중 아지매들은 경찰 방어벽을 뚫기 위해 아들 같은 전경들에게 차마 어찌 못하고 옷핀을 찔러대며 길을 틔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없어진 지 20년 가까이, 지금은 흔적만으로 위치를 가늠할 뿐인데 이곳 일대 주민들은 잠수교를 이야기한다. 그 시절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이 담겨 있다.

이곳에서 살짝 북쪽으로 올라가면 현 금산교이다. 금산교는 진주시 초전동과 금산면 중천리를 잇는 다리이다. 금산교 앞에는 100년이 넘게 서민들과 같이해 온 역사를 뒤로한 채, 현재 출입통제된 진주의료원이 있다. 인터넷 지도상으로도 (구)진주의료원이라 표기됐다. 진주의료원은 1910년 진주자혜의원으로 시작했다. 1925년 경남도립 진주의료원으로 개칭되었고 1983년 경상남도 진주의료원으로 개원했다. 중안동에서 이곳 초전동으로 이전해온 것은 2008년 2월이다. 하지만 불과 몇 년 후인 2013년 5월 폐원했다. 경남도는 이곳에 서부청사를 열겠다고 하지만 현재 시민들은 진주의료원재개원 시민대책위원회를 꾸려 '진주의료원 재개원' 찬반 주민투표를 하자고 도민 14만 명의 서명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하촌천이 남강과 합류하는 곳에 장흥교가 있고 현재 자전거 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초전동(草田洞)을 좀 더 이야기하자. 초전동 일대의 변화는 진주 근대개발의 역사와도 같다. 초전동은 하대복개천이 남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서부터 장흥교 건너기 전까지이다. 진주문화원 1996년 자료에 따르면 '초전은 풀밭골: 본동의 옛 이름인데, 먼 옛날에는 산기슭 동네여서, 논이 생기기 전에 주로 밭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팥을 주로 심어 생활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민들은 아직 '폿골, 폿시골'이라 칭하기도 한다.

박용식(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논문 '진양지에 나타나는 진주의 고지명 고찰'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 현재의 초전지역이 제방을 쌓아 개간하기 전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넓은 저습지가 있었던 지역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초전동(草田洞)은 이러한 지리적 특징을 살려 지은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즉 초전(草田)의 '전(田)'은 산을 개간한 밭이 아니라 강가의 저습지로 보면 '토지평연(土地平衍)'한 지역을 '초전(草田)'이라 이름 지은 까닭이 설명된다. '초전동(草田洞)'은 곧 남강 가에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저습지에 풀이 많아서 지은 이름으로 볼 수 있다.…(생략).

이처럼 지명에서도 이 일대가 어떤 곳이었는지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강 건너 금산면과 월아산이 보인다. 금산면은 최근 신주거지역으로 부상했다.

붕덤이 부엉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장흥교 아래로는 서쪽 말티재 아래에서 흘러온 하촌천이 남강에 합류하고 있다. 장흥교는 1986년 놓인 것으로 현재는 그옆 강둑을 따라 자전거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그리고 남강으로 난 절벽을 잇던 붕덤이산. '덤이'는 절벽을 말하는 것으로 부엉이가 많이 울어대는 곳이라해서 '붕덤이' '붕덤이산'이라 했단다.

주민들은 이곳에 일제강점기 일본군 헌병대가 주둔해 '비행기굴'을 팠으며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다고 말한다.

"요즘으로 치자면 비행기 격납고 같은 거였을 겁니다."

이곳에도 나루터가 있었고 넓고 평평한 밭이 많았는데 '붕덤이밭'이라고 했다. 대부분이 수박밭이었으며 강과 밭 사이에는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하대동에서 초전동으로 이어지는 강둑은 산책로가 닦여 많은 시민이 찾고 있다.

김문금(53·산청군 삼장면) 씨는 이곳 초전이 고향이다. 김 씨는 "붕덤이라는 곳은 높은 절벽이 있는 산인데 옛날부터 부엉이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붕덤이라 했다"며 "댐이 없던 시절이라 강물을 그대로 떠먹었는데 비가 많이 오면 강이 범람해 붕덤이밭이 전부 물에 잠기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남강 상류에 댐이 생길 무렵 붕덤이산은 댐 공사에 쓰일 돌을 캐는 채석장이 되었다. 깎이고 파인 붕덤이산은 더 이상 붕덤이산이 아니었다. 김 씨는 "매일 남포 터지는 소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렸다"며 "GMC(그때 우리들 발음은 제미육발이) 미제 트럭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석재를 실어 날랐다"고 말했다.

1969년 남강댐이 완공됐다. 댐이 생긴 후 남강 하류는 수량이 줄어들고 물길은 예전에 비해 약해졌다. 곧이어 다리가 놓이고 나루터가 사라졌다. 그리고 붕덤이밭도 사라졌고 이곳에서 농사를 짓던 이들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새 농지를 찾아야 했다. 원주민들이 떠난 자리에 새로이 마을이 생기고 건물이 들어서고 새로운 사람들이 터전을 꾸렸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개발 바람이 일었다.

금산교 앞 진주의료원. 2013년 5월 폐원된 후 현재 출입통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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