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가 시작되면 강의 첫머리에는 늘 기본에 대한 이야길 한다. 예술이란 무엇이며, 예술인은 누구이고, 아름다움은 또 무엇인가, 미적 취향과 기준은 어떤가? 학생들에게 건네는 물음이지만 어쩌면 이런 물음은 내게 봄날의 안부 같은 것이다.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아름'은 '알다'의 활용형인 명사형으로 미의 이해 작용을 표상한다. 사전적으로 아름의 뜻은 크다 또는 안다(끌어안는 것)는 의미이다. 고어 '아름'에는 한 아름 두 아름처럼 양팔을 껴안은 둘레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의미로 '나'를 뜻하기도 한다. 나와 비슷한 그 무엇이 있다는 뜻이거나 양팔로 껴안아야 할 만큼 풍요롭다거나 안을 만큼 좋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름답다(美), 곱다(麗)의 어원은 좋다(好), 기쁘다(喜), 즐겁다(樂)이다.

그 아름은 어딜 가 버렸을까! 어원은 보이지 않고 변형과 왜곡을 거쳐서 표피로 가득 찬 아름다운 나라가 되어버렸다.

미술(美術)과 예술가!

이미 풍요로운 탓인지 더 이상 미술의 어원도 낯설기만 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미는 본래 육체적 생명의 보존과 연관돼 있다가 차차 정신적 가치가 갈구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서 드디어는 개성적 표현에 맞닿게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서 미술이란 낱말은 1883년 한성순보에서 처음 활자화됐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미술가들은 폭력의 시대에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로 가득찬 당시의 지식인이 그렇듯 절망한 영혼들이었다. 예술가들의 전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에 사로잡힌 미술가들이 그렇다. 꽃샘추위가 끝나면 무겁고 두꺼운 외투를 벗어야 할텐데.

그리고 미적 취향과 기준은 어떤가?

무엇이 우리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일까? 미디어가 만들어 놓은 모호한 미적 취향과 기준 탓에 아이들은 성형외과를 찾아 미적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한 왜곡을 받아들인다.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과 또 다른 차별이 극심해지고 있다.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황폐하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모습을 지녔고 모두 다른 취향을 가진다. 그러나 모두 똑같이 소중하다.

미술에서 발견한 비율의 기준은 선분(線分)을 크기가 다른 두 부분으로 나눌 때 긴 부분과 짧은 부분의 비율이 일반적으로 약 1.618:1이라고 한다. 이 비율은 옷차림에도, 사람의 몸매에도, 카메라의 규격필름(24×36㎜=5:7.5)에도, 자연의 들과 산의 구도에도, 건축에서도, 이 기준이 적용될 때 보기가 편하고, 안정적이고, 조화롭다고 한다. 많은 예술가들의 암묵적 기준이 된 이 비율이 황금비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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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봄은 지척에서 안부를 묻고 있다. 난만(爛漫)한 봄은 시대를 초월한다. 때 이른 매화는 이미 떨어지고 있고 매개오복도(梅開五福圖)에도 조선의 유산가에도 '화란춘성(花爛春城)'과 '만화방창(萬化方暢)'이다.

/황무현(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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