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2) 진해 웅동, 웅천지역

이번 기획 출발지는 창원시 진해구 웅동과 웅천동 일대 민족주의 항일독립운동 현장이다.

이들 지역을 시작으로 정한 데는 이곳 지역적·역사적 특질이 남다른 데 있다. 진해 웅천은 조선시대 삼포(三浦) 가운데 하나인 제포(薺浦)가 있었던 곳이다.

삼포는 조선시대 일본인 왕래와 거주를 허가했던 남해안과 동해안 세 포구를 말한다. 삼포가 일본에 개항된 것은 조선 태종 7년(1407) 일본과 선린 정책(이웃나라와 친선을 꾀해 협력체제를 강화하는 정책) 덕분이었다. 제포는 부산포, 염포(현재 울산 현대자동차공장 자리)와 함께 일본과 교류 선봉에 섰다.

제포에는 왜관과 함께 일본인 거류지가 생겼다. 세종 초기 60호에 불과하던 항거 왜인 가옥이 성종 대에는 400호, 인구만 2000명이 넘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주기적으로 송환했으나 일본인 인구가 계속 늘어나자 성종은 '왜리'라는 거주 지역을 설정해 살도록 했다.

한데 중종 5년(1510) 4월 제포를 비롯한 삼포 거주 일본인들이 성종 대 이래 엄격한 교역 통제와 연산군 대 운영상 모순에 불만을 품고 '삼포왜란'을 일으켜 조선인 272명을 학살하고, 민가 796호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1905년 11월 일본은 조선과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한 후 본격적인 한반도 식민화 작업 중 하나로 진해만 일대에 군항을 세웠다.

이때 일본은 웅천과 웅동 일대 군항 예정지에 살던 조선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등 온갖 핍박을 가했다. 이렇듯 이 지역은 예부터 바다와 접한 지리적 이점으로 국외 교류가 활발했다. 덕분에 한말 근대화 바람도 일찍 맞았다. 반면 조선시대 왜인과 일본 제국주의를 가장 먼저 정면으로 맞닥뜨리기도 했다. 일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악연으로 묶인 것이다.

박영주 경남대 박물관 비상임연구원은 "진해지역은 일제 식민화 첩경이었다"며 "특히 웅천과 웅동은 일본과 멀리는 가야시대부터 켜켜이 쌓인 관계 속에 있었기에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이 집중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웅동 3·1독립운동 기념비. 박영주 연구원은 이 비가 위치나 비문 내용에서 웅동·웅천지역 3·1운동의 지역성을 담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김구연 기자

◇보존·관리 열악한 근대 교육기관 = 이렇듯 일찍이 근대화 물결이 일렁이던 웅천과 웅동지역은 근대적 민족교육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진해 근대 교육기관으로 1906년 웅천에 개교한 개통학교(開通學校·현 웅천초등학교)와 1912년 웅동에 개교한 계광학교(啓光學校·현 웅동초등학교)는 신식교육 산실로 민족교육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주기효(1877~1941) 선생이 설립한 개통학교는 처음에 북부동 선생 사저에 개교했다가 교실이 협소하자 10월 성내동에 있던 옛 웅천현 서기청 건물로 이전했다가 뒤에 웅천현 객사를 교실로 사용했다. 현재 웅천초등학교 일대로 보면 된다. 이곳에서 주기철, 문석주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됐다. 개통학교는 이제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이 학교가 독립운동가들 산실이었다는 사실은 주기효 선생 제자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고자 1941년 9월 세운 공적비가 알려주고 있다. 또한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역사체험관이 교내에 있어 학교 과거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한다. 안타까운 점은 웅천초등학교 소속이던 수도, 연도 분교가 폐교하면서 이곳에 있던 물건 중 일부를 기념관에 임시 보관 중이라 관람 환경이 썩 좋지 못하다는 점이다. 아쉬운 점은 또 있다. 개통학교는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이 이뤄지는 것을 두려워한 일제 탄압으로 1917년 숙명의숙(주기효가 설립한 여성 교육기관)과 통합돼 웅천현 객사 자리에 웅천공립보통학교로 변모했다. 한데 기념관 내부 전시물을 보면 민족교육이 이뤄지던 사립학교 시절 관련한 자세한 정보를 찾기 어렵다.

이곳은 주기철 목사, 문석주 등 웅천지역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민족개량주의를 내세워 훗날 친일 인사로 분류된 이광수·최남선 등이 교편을 잡은 적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역사체험관은 이와 관련한 역사보다는 일제에 의해 웅천공립보통학교로 변모한 후 현황을 보다 자세히 전시해뒀다. 특히 초대 교장이 1917년 웅천공립보통학교로 변모했을 당시 일본인으로 전시해놓는 등 이 학교가 민족교육 산실이었던 점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함께 현장을 둘러 본 박영주 연구원은 "사립 개통학교 시기 관련 전시를 보다 확충해 후대에 웅천지역이 민족교육 산실이었음을 보다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개통학교 교사로 쓰인 웅천현 객사 건물.

웅동지역 민족교육 산실인 계광학교는 배익태, 이병두, 문석윤 등 지역유지들이 서당인 금동재를 신식학문을 가르치는 교육장으로 바꿔 세운 창동학숙(昌洞學塾)으로 1912년 10월 20일 개교했다. 초대 교장은 웅천 출신으로 민족학교인 오산중학을 졸업한 선각자 백광 김창세가 맡았다. 신식학문을 배우려는 학동이 많아져 금동재 건물로는 감당이 안 되자 그해 교사를 초가 3칸으로 신축했는데 이는 웅동면민회관으로도 쓰였다. 이 학교는 민족운동가들이 주로 교사로 교단에 섰는데, 이들이 1919년 웅동 3·1독립만세 운동 중심에 서 대부분 구속되고 말았다.

한데 이 학교는 3·1운동 당시만 해도 마천동 뒷산 마봉산 기슭 소성재(인천 이씨 재실)에 있었다. 현재 웅동초등학교 자리로 온 것은 1921년 기성회에서 고등과 설립과 함께 교사 이전을 확정하면서다. 이전 후에도 민족교육은 계속됐다. 3·1운동 이후 이 학교 교사로 온 민족운동가 조맹규와 조원갑은 1930년 8월 29일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을 맞아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격문을 뿌려 구속되기까지 했었다. 이 일로 학교는 폐교되고 1932년 웅동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섰다. 이렇듯 민족교육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음에도 웅동초등학교 일대에는 이 같은 내용을 기릴 만한 작은 표지마저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대부분 멸실된 3·1운동 현장 = 진해지역 3·1독립만세운동은 일본 진무천황 제삿날이자 경화동 장날인 4월 3일에 일어났다. 웅천지역에서는 김창업·정운조·김중환·문석주·김석환·김병화 등이 북부동 김재형 전 웅천군수 자택에서, 여성인 주기선·김조이·주녕옥 등이 웅천교회에서 각각 준비를 했다.

웅동지역은 계광학교 교사인 주기용, 배재황, 신자균, 허전 등이 중심이 돼 시위를 계획했다. 시위에 쓸 태극기를 만드는 등 핵심적 밀의를 한 곳은 대장동 죽벽마을 이두용의 집 부엌방이었다. 특히 웅천면민과 웅동면민들은 배재황의 노력으로 연합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실행에 나섰다. 이들은 웅천우시장에서 합세해 시위를 보다 힘있게 전개하기로 했다.

웅천 3·1운동 당시 우시장이 있던 웅천읍성 동문./김구연 기자

4월 3일 웅동 마천리 냇가에 10시에 모인 사람들은 주기용의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웅동면사무소로 가 면장을 시위에 강제 참가시킨 후 400~500명이 무리를 지어 나발등 고개를 넘어 웅천으로 향했다. 시위대가 웅천에 다다랐을 때는 그 수가 2000~3000명이 넘었다.

웅동지역 3·1운동 현장 중 웅동지역 만세운동을 밀의한 이두용의 집은 7~8년 전 초가집을 황토벽과 기와지붕으로 보수했으나 대들보와 주 골격은 보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웅동면사무소는 멸실돼 가정집으로 변모했다. 당시 웅천우시장 자리에는 웅천읍성이 복원돼 위용을 뽐내고 있다. 현재 읍성 동문인 '견룡문(見龍門)'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현장에는 당시 사실을 기억할 만한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특히 이곳은 대대적인 웅천읍성 복원 계획이 세워져 있다. 대신 웅동에서 웅천으로 넘어가는 길에 웅동 웅천지역 3·1독립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박 연구원은 이에 대해 "웅천읍성을 복원할 때 이들 공간에 이곳이 항일독립운동 현장이었다는 작은 표지를 함께 세워 사람들이 역사를 다각적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면서 "기념비도 문제다. 형상화한 조형과 기념비 비문이 전혀 지역색과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아 당시를 기억하는 장치로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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