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세 할머니가 매년 수백 통의 편지를 쓰는 까닭

책 <풍운아 채현국>(도서출판 피플파워)이 발간된 지 보름쯤 지났을 무렵 낯선 이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은 이랬다.

"김주완 씨.

고맙습니다. 기록한 책 보고 너무 고마워서 몇 자 적는 27년생 할머니입니다. 썩은 세상에도 풍운아가 아니라 복된 人生(인생)이 보석처럼 우리에게 기쁨과 보람을 주고 신통력까지 준 것 같습니다.

구절구절 대화하신 內容(내용)으로 代理(대리) 만족을 느끼면서 감격하였답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일을 하셨지만 좋은 기록 많이 해 주십시오.

주소 몰라서 출판사로 보냅니다.

042-000-0000

010-0000-0000

수전증이 있어서 亂筆(난필)입니다.

1. 23 대전에서 장형숙 할머니"

27년생이라면 한국 나이로 89세의 할머니였다. 편지는 흰 복사용지에 검정 볼펜으로 한 자 한 자 눌러쓴 것이었고, 뒷면에는 <한겨레> 김현정 칼럼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대 복사되어 있었다. 칼럼 중 이런 대목이 있었다.

"언뜻 노인이 되면 서로 비슷해져버리는 외모만큼이나 별다른 개성도 욕구도 필요 없이 가만가만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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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숙 어른이 보내온 편지./김주완 기자

순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은연중에 나도 노인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해왔다는 반성이었다.

장형숙 할머니를 뵙고 싶었다. 포털에서 '장형숙'을 검색해봤다. 충남 부여군 '남산골농원'이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장형숙 할머니에 대한 글을 발견했다. 남산골농원 조관희라는 분이 2014년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장형숙 할머니로부터 격려 편지와 함께 만 원짜리 두 장의 후원금을 받고 올린 감사의 글이었다. 사진으로 얼핏 보이는 편지의 한 대목은 이랬다.

"썩은 정치 모리배들의 거친 말이 판치는 때가 왔습니다. 자연을 벗 삼은 농부님들의 수고 덕분에 아직 먹고 살고 있군요.

이름도 생소한 '크라우드 펀딩' 수고 많이 하셔요. 나는 늙어서 동참할 기력도 없지만 박수치고 자랑하고 싶답니다."

내가 편지를 받은 경위와 비슷했다. 할머니는 <한겨레>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고, 신문에 소개된 기사를 보고 <풍운아 채현국>을 사서 읽었다. 남산골농원에 보낸 편지 또한 <한겨레>에 소개된 자연농법 농사펀드에 대한 기사를 보고 격려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한국전쟁 때 부모를 모두 잃었지만…

미리 전화를 드리고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할머니는 대전의 한 주공아파트에서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1922년생)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일제강점기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 10여 년 간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했던 분이었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이 얼마 전 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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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숙 할머니./김주완 기자

"김용택 시인 어머니가 팔십 넘어 글을 배워가지고 '나는 참 늦복 터졌다'며 서툴게 쓴 글이 있다고 해서 그 책도 갖다 보고 했는데, 우리는 부모를 잘 만나 문맹자는 아니어서 어릴 적부터 복이 터졌어요."

그러나 할머니도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꺼번에 학살당한 현대사의 비극을 안고 살아왔다. 당시 외삼촌들이 군인과 경찰이었고 아버지 또한 우익 진영에 가담했던 탓에 전쟁이 터지자 좌익 진영 인사들에 의해 학살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마흔 일곱, 어머니는 마흔 넷의 나이였다.

"그 때 우리 동네에서만 이쪽저쪽 합쳐서 100명이 넘게 죽었어요. 이쪽이 먼저 죽이고 난 뒤, 수복하면 그 원수 갚는다고 저쪽에서 또 죽이고…."

그렇게 부모를 잃었으니 이른바 진보 또는 좌파에 대한 원한 같은 건 없을까.

"그거 겪지 않은 사람은 잘 몰라요. 공산당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는데…. 사실은 활동한 사람도 뭐가 뭔지도 모르고 순전히 사적 감정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어요."

사실 나도 한동안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학살 취재에 몰두했던 적이 있었다. 좌우 이념과 무관하게 사적 감정에 따라 학살당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이 또한 전쟁이 낳은 비극이지 이념 자체가 본질은 아니었다. 부모를 그렇게 잃었지만 장형숙 할머니는 이런 학살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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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숙 할머니 침실 벽면의 메모./김주완 기자

신문에서 좋은 사람을 찾아 격려 편지를 쓴다

할머니가 유독 <한겨레>를 구독하는 이유는 뭘까.

"제일 정직하잖아요. 제일 정직해. 경향신문하고…. 기사를 읽어보면 정직하다는 걸 알게 돼요. 그리고 이 신문은 국민들이 주를 모아서 만들었잖아요."

마침 침대에 <한겨레> 신문이 놓여 있었다. 1면에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이 실린 신문이었다.

"우리 영감도 이걸 보는데, (이명박 얼굴을 가리키며) 영감이 '어이구. 보기도 싫은 얼굴이 나왔네' 그랬어."

-이번에 자서전 책을 냈더군요. <대통령의 시간>이라고….

"그러니까 더 말썽이 많더만. 뭐 잘 한 게 있다고. 볼 가치도 없는 걸."

-이명박 대통령이 뭘 잘못했나요?

"(목소리를 높이며) 4대강 다 망쳐버렸다매. 내가 다 해봐서 안다면서. (웃음)"

-다른 불편한 데는 없습니까?

"다리는 별로 안 불편한데 인제 늙으니까 허리가 시원찮아서 끼니 해먹고 나머지 시간은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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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숙 할머니의 책꽂이./김주완 기자

-밥은 세 끼 모두 할머니가?

"해야지. 반찬도 다 내가 해야지."

-한겨레신문은 언제부터 구독하셨습니까?

"오래 됐어요. 10년도 더 됐지 아마? 처음에는 조선일보를 봤는데 서울에 있는 동생 남편이 이걸 보고 있어. 그 때부터 봤는데, 죽을 때까지는 봐야 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그쪽에 쓴 편지도 한겨레 신문 기사를 복사해서 보냈죠?"

-네. 그랬죠. 김현정 칼럼 뒷면에 편지를 써서….

"그래서 지금도 좋은 글이 있으면 관리사무소나 교회 가서 이렇게 크게 복사해 그 뒷면에다 편지를 써서 보내요. 그러면 받은 사람도 좋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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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숙 어른은 좋은 글을 보면 일일이 스크랩해 둔다 ./김주완 기자

이처럼 할머니는 신문을 보다가 좋은 글이나 좋은 사람, 좋은 책을 발견하면 주소를 수소문하여 편지를 보낸다. 언제부터 이 작업을 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적어도 10년은 더 됐다고 한다. 어떤 때는 일주일에 10여 통의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고 하니 연간 수백 통, 지금까지 할머니의 편지를 받은 사람은 적게 잡아도 1000명은 넘을 것이다.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나요? 편지라도 써서 좋은 일 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된다면 보람이지요. 진짜 보석 같은 사람들이 많이 숨어 있는 것 같아. 특히 시골에 그런 보석이 많이 살아요."

할머니가 읽는 책들을 보니…

할머니의 작은 방에는 책이 빼곡했다. 머리맡에 <풍운아 채현국>과 <길 위에서 만난 북한 근현대사>, <중국농민르포>도 있었고,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려는 듯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도 베개 위에 놓여있었다. <눈 먼 자들의 국가>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2>도 있었다.

또 책꽂이에는 안도현의 <백석평전>, 리영희의 <대화>를 비롯, 한승헌 변호사와 박원순 서울시장, 백기완 선생, 방송인 김미화의 책들이 꽂혀 있었고 <허삼관 매혈기>, <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같은 비교적 근래에 나온 책도 있었다.

-이 책도 나온 지 얼마 안 된 책인데요?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는.

"이것도 신문보고 샀어. 읽고 편지도 보냈어요. 일본으로…."

-저자 와다나베 씨한테요?

"응. 저자한테…. 일본에 있는 동창을 통해 주소를 알아가지고…. 중국 책 읽으니까 중국 위치 알려고 저렇게 지도 붙여놓고 미국 책 읽으니 또 저렇게…. 이제 늙으니까 한자도 자꾸 잊어버려. 자꾸 잊어버리니까 이렇게 써놔야 하고…."

할머니 말대로 벽에는 교토의정서 : 기후변화협약, IMF : 국제통화기금, 모기지론 : 장기주택자금대출, 네이스 : 교육행정정보시스템, 스톡옵션 : 주식매수선택권, SNS : 사회관계망서비스 등 용어와 한자, 성경 구절 등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고, 미국과 중국 지도도 붙어 있었다.

-책을 많이 보시는데 눈은 잘 보이십니까?

"응. 아직까진 시력이 괜찮아요."

-김대중 옥중서신도 보셨고, 자서전도 있네요.

"응. 자서전 두 권인데 한 권은 우리 손자 보라고 보내고. 이건 새로 나온 책인데 백석평전. 안도현이 쓴…."

-안도현 씨가 글을 참 잘쓰죠?

"네. 신문에 계속 나왔잖아요."

-백석평전도 다 읽으셨습니까?

"네."

-주로 어떤 책을 좋아하십니까?

"소설보다, 이것 재밌게 봤네. 누가 빌려줘서 봤는데."

-아, 박원순 서울시장이 쓴….

"그런데 늙은이가 어떻게 알겠어. 신문에서 소개해주니까 알지."

-네. 신문에서 소개한 걸 보고 사서 보시는군요. 책은 주로 어디서 사십니까?

"내가 직접 계룡문고에 가서 사가지고 와요. 전화하면 언제 왔습니다 하고 연락이 와요. 없으면 주문하고…."

-서울 교보문고도 전화번호를 적어 놨네요?

"네. 여기서 없다고 하면 교보문고에 연락하니까 있다 하더라고. 우리가 모르는 것 너무 많잖아요. 이런 말(SNS, IMF 등)도 신문에 보면 모르니까 이렇게 써놓고…. 요새 컴퓨터나 인터넷은 모르고, 배우지도 않았고…."

또 다른 채현국, 또다른 어른을 만나다

-이렇게 끊임없이 책을 보시는 이유가 뭡니까?

"재미있으니까. 역사에 대한 사실을 알 수 있으니까. 유라시아고려인 이것도 재밌어요."

-이 책은 왜 보셨습니까?

"우리 동포들이 올라가가지고 쫓겨다니고…. (<중국 농민 르포>를 가리키며) 이건 너무 지루해가지고 진도가 안 나가네. 이런 것은 재밌잖아요. (<북한 근현대사>를 들고) 우리가 경험한 것이니까."

-<풍운아 채현국> 책은 어땠나요?

"책 중에 제일 빨리 읽었어요. 정말 이건 그날 와서 다 읽어버렸어."

-책이 그렇게 두껍지 않으니까.

"응. 두껍지 않기도 하지만 재미있어 아주…. 이건 두 번 읽어도 재밌고, 세 번 읽어도 재밌고…. 그래서 내가 이걸 읽고 우리 아들들도 좀 읽으라고 줄라고 해. 한 권 더 사서 줄까 어쩔까 생각하고 있어요."

할머니에게 요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냐고 물었다.

"(한숨을 쉬듯) 젊은이들이, 젊은이들이…. (잠시 침묵) 과거를 모르니까, 이런 책에도 나왔지만 분별력이 없는 것 같아요. 진보당 해산시킬 때도 그랬지만 너무 세상사에 무관심해진 것 같아요. 말 바르게 하는 젊은이들이 없어. 그러니까 지금 야당이 무능하다고 하잖아요. 신문을 보다가도 야당 기사는 안 보게 돼. 짜증이 나. 이제 흥미가 없어서 읽지를 않아. 여당 제2중대라고 그러는데…."

할머니에게 '젊은이'란 각계에서 활동 중인 40·50대는 물론 60대나 70대까지를 지칭하는 듯 했다.

-89세인데, 살아보시니까 어떻게 사는 게 좋은 삶이던가요?

"늙은이가 뭘 알겠어요? 나 하나 관리하기도 힘든데…. 지금 바른 소리 하는 사람도 없고, 말할 만한 사람은 입 다물고 있잖아요. 자칫하면 종북몰이로 되니까. 입 다물고 있잖아요. 그래야 편하잖아요. 옳은 사람들은 모두 숨어 있어. 햇볕 뜰 때가 있을라나?"

마지막 말씀은 비관적이었지만, 그래도 책을 볼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는 한 좋은 사람에게 편지 쓰는 일은 계속하겠다고 했다. 1시간 20여 분간 만나본 장형숙 할머니는 나에게 또 다른 채현국, 또 다른 이 시대의 어른이었다.

장형숙 어른, 부디 건강하게 오래 사셔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등불이 되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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