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사전적 의미는 남성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세포생태학적으로 여성과 남성은 몸의 세포속 염색체의 차이에서 출발한다.

올포트 버논의 가치조사에 따르면 “여성은 심미적·사회적·종교적 가치가 남성보다 더 높으며 이는 예술·종교·사회복지 등에 대한 지향이 남성보다 강하다”고 한다.

또 다른 학자 베넷과 코헨은 여성에 대한 접근을 다섯가지로 요약했는데 첫째, 남성의 사고는 여성의 사고보다 강도가 약하다는 것이고 둘째, 여성의 사고는 환경지향적이다. 셋째, 여성의 사고는 상벌이 환경의 우호성이나 적대성의 결과로 결정된다고 예상하며 넷째, 여성의 사고는 사회적 사랑이나 우정에 대한 욕망과 연결되어 있고 다섯째, 여성의 사고는 우호적이며 쾌적한 환경속의 구속없는 자유에 가치를 부여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음악사적으로 나타난 여성은 남성우위적 사회에서 편견과 무시가 극에 달했다. 음악은 오랫동안 남성에 의해 창작되고 연주·지휘되었으며 노래도 수세기동안 공공장소에서는 오직 남성에 의해서만 불렸다.

이러한 것은 무엇보다도 여성에 주어진 교육기회의 부족이 여성을 퇴보시켜서 열등한 존재로 머물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여성은 사회적·문화적 소외와 함께 문화를 이해할 수 없는 이중의 학대를 받아야만 했다.

양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초기 기독교에서 어느 시기까지는 여성도 교회에서 노래부르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차츰 종교회의에서 여성을 소외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어 끝내 826년 로마교황청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토가 있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남의 이목을 끌기 위해 이교도처럼 춤추거나, 세속적인 노래를 부르면서 주일이나 축제일에 교회로 온다.”

이러한 사고는 당시 교회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자행됐다. 그나마 수녀원을 중심으로 합창단이나 기악연주는 그러한 편견속에서도 발전하였으며, 맑은 노래소리와 높은 음악적 감각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16~17세기에 이르러서 이탈리아의 수녀들은 음악연주뿐만 아니라 작곡자로도 두각을 나타내 현재까지 13명의 수녀들의 작품이 모테트로 남아 있다. 17~18세기가 되자 베니스에서는 4개의 여자음악학교가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여성오케스트라가 편성되고 오라토리오가 공연되었다.

업으로서의 여성음악인은 사회적 편견과 무시에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중에도 클라라 슈만(1819~1892)과 코지마 바그너(1837~1930)·파니 헨젤(1805~1847)·알마말러-베르벨(1879~1964)과 이귀련(1962~) 등 훌륭한 여성음악가가 있었다.

그 중에도 클라라 슈만은 11세가 되는 해에 음악이론과 작곡을 에브레고크 바인리히에게 사사한다.

11세때 작곡한 그녀의 첫 작품은 〈피아노를 위한 4개의 폴로네이즈〉이며, 이는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음악홀에서 첫 연주해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당시 관객들은 연주뿐만 아니라 작곡에 대해서도 대단한 찬사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타르 신문에서는 당시 그녀의 연주를 ‘섬세하고 경쾌하며 독창적인 작곡으로 사람을 놀라게도 하고 기쁘게도 한다’고 평했을 정도다.

13세때에는 파리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으며 협주곡도 작곡하기에 이르렀다. 26세때인 1835년에는 자작곡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대 작곡가 로버트 슈만과의 결혼이후 그녀는 전통적인 아내의 의무와 예술가의 역할사이에서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녀는 주부로서 어머니로서의 책임에 시달려야 했고, 출산 또한 연주회에 커다란 장애가 됐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비평가들에게 높이 평가되고 있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안목은 남편인 로버트 슈만을 능가했다.

지마 바그너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바이츠만으로부터 작곡수업을 받았고 문장실력도 뛰어났다. 코지마는 자신의 가정을 살롱으로 개방해서 젊은 여성들의 개성과 정신세계를 성장시킬 수 있게 했다. 모여드는 작가·예술가와 교류를 통해 자신의 음악적 역량도 넓혀 갔다. 또한 그는 남편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서는 거의 종교적으로 숭배하다시피 했다. 아내로서의 내조 또한 뛰어났다.

하지만 파니 헨젤은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로 작곡에 대단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의 반대로 작품출판도 제대로 못했다.

그녀의 초기 작품은 동생 펠릭스의 이름으로 출판되었으며 이러한 여성에 대한 편견과 자신의 고민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실내악곡과 3중주곡 등 다양한 악곡은 지금까지도 성공리에 연주되고 있다.

알마 말러- 베르벨은 젬린스키에게 작곡을 사사했다. 1902년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했다. 결혼후 구스타프는 아내에게 자기를 위해 헌신한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남편인 구스타프는 우연히 그녀가 작곡한 가곡을 발견하고는 감격해서 그녀에게 작곡을 권유하게 된다. 그후 알마말러는 남편의 지원아래 지속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편 경남의 여성작곡가 이귀련은 남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욕지도에서 태어났다. 주변의 새와 바다와 나무들은 자기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는데 훌륭한 예술적 소재가 된다.

1999년 6월3일에 공연되었던 가곡들은 부르기 쉬우면서도 아름다운 노래의 향연이었으며 5음음계와 선법, 그리고 현대적인 화성과 음악의 기법들은 그의 작품에서 무수히 찾아 볼 수 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대화〉, 7개의 악기를 위한 〈난쟁이의 춤〉, 합창곡 〈시편24〉에 그런 소재는 잘 나타난다.

이렇듯 여성의 섬세함과 예술적인 가치는 사회적인 편견과 무시에도 불구하고 숭고한 예술적 정신으로 받들어져 면면히 이어왔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출산과 육아·아내로서 부모로서의 갈등과 사회적인 편견과 무시속에서도 숭고한 예술의 혼으로 승화되어 표현된 이들의 작품은 이번 윤이상 현대음악제에서 ‘음악과 여성’이란 주제를 통해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이번 현대음악제를 통해 여성에 대한 진지한 존경의 마음이 예술인들과 일반관객들 사이에서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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