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오백리] (19) 진주시 진주교∼남강교

"남강이라 하지 않고 고마 큰 강이라 했제. 백사장이 워낙 넓었으니 지금보다 강폭이 2∼3배는 넘었을끼야. 어린 눈에 처음 봤을 때 아 이리 끝이 없는 강도 있구나 싶었으니까."

김재구(78·진주시 중앙동) 씨는 1960년대 초반 고향 합천에서 나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진주에 왔을 때 남강을 본 첫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중앙파출소에서 반도병원 앞 도로가 둑이었던가. 사변 직후만 해도 시외버스주차장이고 동방호텔이고 전부 남강 백사장이었으니. 지금 시청 있는 데는 전부 모래땅 논밭이었제. 쌔빠지게 농사지어봤자 비만 오면 다 잠기고."

당시 진주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먼저 남강이 예전에는 지금과는 달랐다고 말한다. 50∼60년 사이에 확 달라져 심지어는 지금 남강을 보고는 남강이 아닌 것 같단다.

새벼리 석류공원에서 내려다본 남강 물길. 칠암동과 상평동이 한눈에 보인다./사진 홍상환

"저기 우찌 남강이라카것노예?"

진주 역사에 나오는 남강, 옛 사람들이 읊던 남강은 지금의 남강이 아니라는 말이다. 도시 구획정리와 근대 개발 이전에 남강을 낀 진주는 어떠했을까, 사람살이는 어떠했을까 싶다.

1980년 5월 시위대의 '남강도하작전'

1980년에는 대학생 시위대의 '남강 도하'가 발생하기도 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해가고 있던 1980년 5월 12일 진주에서는 4·19 이후 최초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경상대학교 칠암캠퍼스에서 열린 시국성토대회에는 1500여 명의 학생이 모였다. 정오부터 교외로 진출하려던 학생들은 전경들과 대치하던 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한 학생이 쓰러졌다. 격분한 학생 1500여 명은 가뭄으로 수심이 얕은 학교 동쪽 남강을 바지를 걷고 건너 시내로 진출했다. 경상대 학생운동사에서 '남강도하작전'으로 일컬어진 이 시위에서 시내로 들어가던 중 진양교와 뒤벼리에서 또다시 전경들과 충돌, 학생과 교수, 전경 등 6명이 다치기도 했다.

학생들은 진주시청 앞까지 진출하여 '유신잔당 정치생명 완전 청산', '매판경제구조 철폐', '사북탄광, 동국제강, 생존 투쟁자 석방', '언론의 제기능 확보'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경상대학교, <경상대학교 40년사>, 1988)

1970년 도동지구개발에 큰들은 사라지고

진주는 뒤벼리를 경계로 시내권역과 도동권역으로 나뉜다. 뒤벼리를 넘어가면 상대동 등 4∼5개 행정동이 있는데 통틀어 '도동'으로 일컫는다. 1938년 지방행정구역 개편 시 진주읍으로 명명되기 전까지는 도동면(道洞面)이었다. 여러 번의 행정개편이 이뤄졌지만 '도동'으로 불리던 그때 지명은 주민들에게 계속 남아 현재의 법정동 행정동과는 상관없이 장년층에는 여전히 '도동'이라 말하는 이들이 꽤 많다. 일제강점기에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됐지만 '도청이 있던 동네'로서의 자부심과 고집이 은근히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도동벌은 1970년 도시계획으로 급격히 변화해 지금의 상평동이 되었다./사진 홍상환

도동 지구는 1960년대 후반 향도이촌 현상으로 의령, 합천에서 이주해온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모래땅에다 농사를 짓거나 1970년대 후반 상평공단이 조성되면서 공장 노동자로 유입되었다.

정동철(53·진주시 상대동) 씨는 '도동 토박이'다. 선학산 자락을 끼고 살며 선학재를 넘나들며 진주 시내에 왔고 도동벌 논밭과 백사장을 놀이터라 여기며 자랐다.

"돼지를 마이 키운다꼬 돗골, 돝골이라 했다데예. 1960년대 말까지 상평공단이고 전부 모래땅 논밭이었습니더. 법원 뒷길에 약담몰(번덕골)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거기서 보면 지금 홈플러스 쪽은 전부 강이었지예. 민물에서 나오는 큰 조개(대합) 캐고 맨발로 들어가서 발바닥으로 잡았지예."

선학산 뒤쪽으로 정부에서 난민정착사업으로 칸칸이집을 조성해 집단이주를 하도록 했는데 그때 새로 마을이 들어섰다. 각목과 판자, 대나무를 엮어 흙집을 지었는데 아궁이에 불 때는 거라 아이들은 아침에 눈 뜨면 집 뒤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부모들은 발이 푹푹 빠지는 물길을 걸어 강변 모래땅으로 농사를 지으러 나갔다.

상대동 구 법원 뒷길 끝에는 BBS자동차학원이 있었다 한다. 지금의 창신자동차학원이다. 이 학원은 지금과는 달리 기숙사가 있는 자동차학교 같은 것이었다.

"지금 나이 많은 택시기사들 대부분은 거기서 운전에서 정비까지 배웠을 겁니다. 실습이라는 게 남강백사장에 깃발 꽂아놓고 쓰리코타(스리쿼터) 경운기엔진 5톤짜리로 연습하는 거였지예."

돗골 사람들이 시내로 가는 길은 선학재였다. 지금은 뒤벼리에 다릿발을 세워 도로를 확장해놓았지만 당시는 '갱벤'이라 우마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정도였다.

정 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현 진주교에서 남강교 사이에는 2곳의 나루터가 있었다.

"법원 뒤 삼거리 주유소 횡단보도에서 강 쪽으로 수로조합 양수터가 있었지예. 거기서 강 건너 세무서 쪽으로 나루터가 있었습니다. 강폭이 넓었는데 간짓대가 있어서 널빤지배를 타고 갔습니다."

남강 물길은 돌면서 뒤벼리 암벽에 부딪혀 칠암동 쪽을 파고들었다. 칠암동은 당시 '치암이' 나루터가 있었다. 현 경남과기대에서 경상대학병원까지 일곱 개의 바위가 있어서 치암이라 불리었단다.

옛 나루터가 없어진 자리 근처에는 진양교가 들어섰다. 진주시 칠암 지역과 도동 지역을 잇는 진양교는 1969년 건설됐다. 당시만 해도 도동 지역은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진 허허벌판이었다. 1970년 도동 지구 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 모래땅에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보상을 받고 더 이상 농사를 안 짓게 됐다.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돈을 쥐어봤자 다 남의 돈이라예. 돈이 생기니 이리저리 장사한다고 다 돈을 날려버렸지예. 남이야 므라카든 끝까지 농사 짓던 초전동 사람들은 나중에 땅부자가 됐다아입니꺼."

김시민대교를 지나 남강교로

도동벌은 한들, 큰들로도 불리었는데 상평들을 말한다. 지금 상평들은 크고 작은 다양한 업종의 공장들로 꽉 차 있다. 반듯하게 구획 정리가 잘 된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도로표지판 대신 업체명으로 빼곡히 채운 '입주업체 안내표지판'이 종종 눈에 띈다. 대략 현재 무림페이퍼에서 상평교 사이에서 '웃들'과 '아랫들'로 나뉘었다. 웃들에는 치암이 나루터가 있다면 아랫들에는 문산 가좌동으로 이어지는 나루터가 있었다 한다.

강기량(70·진주시 상평동) 씨는 "지금 경남일보 앞으로 대나무숲이 있었는데 그 어귀쯤 나루터가 있었다"고 했다. 강 씨는 자신은 평생 솔밭공원 근처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솔밭공원은 공원 되기 전에 고마 도동솔밭이라예. 솔씨가 날아와 자연스레 솔밭이 된 긴데 그걸 공원으로 꾸며놓은 기지예. 옛날부터 도동 사람들 노는 장소고 학생들 소풍장소 아입니꺼."

상평동 무림페이퍼를 지나 남강 둔치에 내려서면 모래톱과 수변식물들 사이로 산책로를 이어놓았다. 길은 물길을 건너기도 하며 이리저리 이어져 있는 강 속 길인데 아래 상평교 쪽으로 이어져 있다.

상평교를 지나면 지난 1월 1일 개통한 김시민대교이다. 상평공단과 혁신도시 충무공동을 잇는 다리이다. 진주시에서는 '진주 랜드마크'를 구상하며 740억 원을 들였지만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김시민대교에서 남강교는 금방이다. 2001년에 남강교가 개통하자 문산읍 주민들의 교통·생활권이 한결 수월해졌다.

2015년 1월 1일 개통한 김시민대교./사진 홍상환

남강교를 지나자 물길은 이제 도심을 다 빠져나왔는가 싶을 만치 넓은 강폭을 펼쳐놓는다. 흐르는 물길 왼쪽으로는 강을 따라 이미 새로운 주거촌 상대2동과 하대동이 형성된 지 오래다. 1982년 도시구획정리와 함께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논밭을 이루던 곳은 진주 동부지역의 가장 번화한 곳으로 변화했다. 이곳은 문산읍과 충무공동 혁신도시를 차례로 돌아온 영천강이 남강 본류에 물줄기를 더하며 자연스레 두물머리를 이루고 있다.

아직 먹이가 풍부한지 백로, 청둥오리, 논병아리, 물닭 등 여러 종의 새들이 군데군데 무리를 이루고 있다. 고운 모래톱과 키 작은 수변 식물이 어우러져 있는 풍경은 새삼 이게 남강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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