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생아~신(父生我身), 모국오~신(母鞠吾身), 아버지는 내 몸을 낳게 하시고, 어머니는 내 몸을 기르셨으니….”

창원향교 명륜학당에는 하루종일 사자소학(四子小學)을 외는 아이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한글을 깨치지도 않았을 어린아이부터 초등학생까지 책을 펼쳐들고 줄줄이 사자소학을 외고 있고, 그 중에는 어머니들도 눈에 띈다.

이곳에서 3년째 사자소학·대학은 물론 전통예법까지 가르치고 있는 이청암(46·성균관 창원향교 사회교육원장) 훈장.

이웃집 아저씨같은 서글서글한 인상에 특별해 보이지 않는 현대식 한복을 차려입은 것으로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거쳐 밟아온 인생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부산 해운대에서 태어났다. 황해도가 고향인 할아버지가 전쟁통에 남쪽에서도 끝인 부산에 정착하면서 8살까지 부산에서 살았다.

황해도 해주에서 마을 훈장을 하시던 할아버지 영향으로 한글을 깨치기 전에 사자소학을 먼저 배우면서 한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었고, 목수일을 하시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문에 목수일도 곧잘 했다.

초·중·고등학교를 창원에서 마친 그가 대학을 가기 위해 선택한 것은 엉뚱하게도 철학이었다.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 입학하면서 동서양의 사상에 심취했다가도 불쑥불쑥 선문답을 내뱉는 청년으로 대학4년을 보냈다.

그리곤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을 입학해 졸업하면서 곧바로 강원도 춘천상업고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이도 오래가지 않았다.

교사의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침의 대가로 등록금을 내라고 말해야 하는 현실이 싫어 6개월만에 교사직을 그만뒀다.

이때부터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산다.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고 강원도에서 걸어걸어 경북 안동까지 갔다. 달랑 배낭 하나를 메고 강원도를 떠나 안동에 도착했을 때가 6개월 뒤였단다.

“방랑시인 김삿갓을 닮아보고 싶어 무작정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죠. 남들이 보면 미친짓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는 그게 좋았어요. 지금도 그때의 자유가 그리울 때가 많죠”라며 그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맺힌다.

그 후, 그는 신춘문예에 미쳐 지냈다. 4년동안 지리산 백무동을 중심으로 이곳저곳 안 다닌 곳 없이 다니면서 글을 쓰기도 했고, 한자의 원리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했던 것도 그때였다.

그러던 그가 평범한(?) 삶으로 돌아온 건 지금의 아내 정둘선(41) 씨를 만나면서 부터.

지리산 수행 중 진해 성선암에 들러 청년회 법회포교부장을 맡기도 했던 이씨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 처음으로 건넨 말은 “낭자의 몸은 그대 꺼요·”였단다.

선문답으로 시작된 만남이 결혼이란 결실을 맺기까지 1m20㎝가 넘는 장문의 편지가 갈수록 곱에서 곱으로 늘어 9m80㎝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결국 결혼은 그의 방랑기와 기행(?)을 멈추게 한 묘약이었다.

87년 결혼과 함께 ‘처자식 묵이 살릴라꼬’(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창원시 팔룡동 소재 고무공장에 취직했다.

하지만 고졸로 속이고 취직한 고무공장도 결국 학력을 속인 탓으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둬야 했다.

그리고 시작한 일이 2년간의 유치원운영, 5년여의 목수 일이었다.

하지만 유치원은 적은 돈에 방송국견학에다 시골로 모심기, 산으로 들로 체험교육 등 현장실습을 표방한 덕분에 2년을 못 넘겼고, 목수일은 별안간 찾아든 IMF 때문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가 목수일을 하면서도 계속했던 일이 야간서당을 통해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90년부터 약 5년간 지금의 진해시 석동 주공아파트 지하에서 석주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모아 한학과 전통예절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시작된 일이 결국 98년 창원향교 명륜서당에 적을 두게된 계기가 된다.

창원향교에서 훈장으로 일하면서 진해도천초등학교, 창원중앙·동산·웅남·토월초등학교 등에 전통예절과 한문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내 것에 집착합니다. 남을 생각하지 않는 나는 존재할 수 없다는 걸 가르치고 있죠. 가정이나 학교에서 혹은 사회에서 물질을 초월해 남을 배려할 수 있는 교육풍토가 하루빨리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이 훈장은 욕심(·)이 많다. 날로 자기중심적이 되어가는 아이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들, 자연에서보다 서양의 파괴적인 문화에 물들어 가는 아이들을 위해서 좋은 밭이 되고 땅이 되려는 일을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는 ‘답게’ 살아가자는 운동을 실천하고 싶어요. 어른은 어른답게 아이는 아이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학생은 또한 학생답게.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본분에 맞게 살아가도록 가르칠 수 있는 교육을 할 생각입니다.”

그 구체적인 것이 앞으로 몇 년 뒤면 기존 교육의 틀을 깨고 새로운 형식의 대안학교를 세우는 일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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