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9) 김양수 진주 선명여고 배구 감독

진주 선명여고는 여고부 배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팀이다.

지난 1985년 창단한 선명여고는 90년대 침체기를 겪기도 했지만,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다시 부활찬가를 부르고 있다.

선명여고 부활의 중심에는 김양수 감독이 있다. 1998년 부임해 올해로 17년째 선명여고 배구부를 이끄는 김양수(50) 감독을 만났다.

선명여고는 2008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우승 트로피를 수집 중이다. 특히 지난해에는 춘계전국남녀중고배구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전국종별선수권대회, 전국체전까지 출전한 3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이재영, 이다영, 하혜진, 김예지 등 걸출한 스타 선수가 배출돼 가능한 성적이었지만, 배구계에서는 김 감독이 아니었다면 선명여고의 부활은 쉽지 않았다는 게 중론이다.

부임 이후 해마다 뛰어난 결과물을 만들어낸 김 감독은 지난해 청소년대표 감독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지도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있지만 선수 시절 김 감독은 평범한 선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수로서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갔다. 배구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키'가 일찍 성장을 멈춰버렸다.

진주 배영초에서 진주 동명중 입학 당시 그의 키는 168㎝였지만, 중학교 2학년때 173㎝까지 커 주위의 많은 기대를 받는 선수였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 이후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지금도 김 감독은 중학교 2학년 때와 키가 똑같다.

17년째 진주 선명여고 배구부를 이끌고 있는 김양수 감독.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김 감독은 "키가 더는 자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좌절감도 있었지만 나름 열심히 배구공을 때렸다. 다행히 고등학교, 대학교까지는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선수 김양수는 대학교를 끝으로 사라졌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대학 시절 내내 팀 내에서도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이런 성실한 모습을 지켜본 그의 은사는 그에게 지도자 생활을 권했다.

김 감독은 1992년부터 6년간 한일합섬 배구팀 코치로 일했다.

그는 "실업팀에서 경기 한 번 나서지 못한 제가 실업팀 코치로 들어가려고 흘린 땀은 상상 이상이었어요. 대학 시절 선수로서 큰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팀을 위해 묵묵히 뒤에서 일을 하다 보니 기회가 찾아왔죠. 그러다 선명여고 강경종 이사장님의 도움으로 또 다른 인생을 살게 됐습니다"라고 했다.

그가 이야기한 다른 인생은 고향인 진주로 귀환이었다.

막상 고향행 권유는 받았지만, 여건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특히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다. 실업배구팀 코치로 6년을 재직하며 서울에서 어느 정도 자리도 잡았는데, 갑작스럽게 서울을 떠나 진주로 가겠다는 폭탄선언에 가족들은 의아해했다.

김 감독은 "말이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처럼 아내가 서울생활을 고집했다. 선명여고가 제시한 조건은 솔직히 과분했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지도자보다 정년이 보장된 체육교사와 배구팀 감독을 동시에 제의했던 터라 결국 뿌리치지 못했다"며 고향행을 택한 배경을 설명했다.

경남도민일보와 인터뷰 중인 김양수(왼쪽) 감독.

1998년. 그는 체육교사이자 선명여고 배구부 감독으로 고향인 진주로 왔다.

그가 처음 부임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선명여고 배구부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그 당시에는 선수 수급 자체가 너무 어려웠어요. 시설은 다른 팀에 비해 좋지 않고, 지역에서 좋은 인재는 모두 서울행을 외치다 보니 팀을 재건하기 어렵겠다는 생각도 했죠."

하지만, 선명여고 배구부는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배구에 대해선 무조건 'OK'인 강경종 이사장의 힘이 컸다.

선명여고는 선수들에게 일체의 돈을 받지 않는다. 숙식이며 훈련, 대회 참가 등 모든 비용을 학교에서 대준다. 이런 소문이 나면서 지금은 다른 지역에서도 선명여고에 진학하려는 선수들이 많아졌다.

강 이사장이 2급 심판 자격증을 딸 만큼 배구에 대한 관심이 많다. 팀이 출전하는 대회는 대부분 따라가 응원하고, 배구부 잘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도와준다.

김 감독도 "강 이사장님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선명여고 배구는 없었을 것"이라며 고마워했다.

김 감독은 수많은 우수 선수를 배출했지만, 프로팀이나 대학으로 진학하지 못한 선수들에게도 각별한 신경을 쓴다.

그는 "제자들에게 미래를 열어주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다. 내가 선수로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선수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배구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실력이 출중하지 않은 제자에게는 또 다른 진로를 보여주려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선명여고 배구부는 일주일에 2번은 학교에 근무하는 영어 선생님에게 특별 수업을 받는다. 선수들이 운동뿐 아니라 공부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걸 보고 김 감독은 자신의 방을 선수들의 공부방으로 선뜻 내주기도 했다.

그는 또 선수들에게 '인성'을 강조한다. 김 감독은 선수들에게 "선수가 되기 전에 인간이 먼저 되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래서인지 선명여고 선수들은 항상 인사를 잘하고 착하다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많이 듣는다.

그는 "실력이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인성이 받쳐주지 않으면 결국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다. 큰 선수가 되려면 기량 이외에도 인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학교 때부터 이런 걸 강조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선명여고 배구부는 의외로 훈련량이 많지 않다. 오전에는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 수업을 듣고, 오후에만 선수로 생활한다. 하루 훈련량도 3시간을 절대 넘지 않는다.

김 감독이 많은 훈련량보다는 집중력을 높인 양질의 훈련을 선호하는 까닭이다. 다행히 선수들도 감독의 의중을 파악한 덕인지 훈련할 때는 절대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지난해 전국대회 3관왕을 차지했던 선명여고는 4명의 프로선수를 배출했다. 여자배구 드래프트에서 쌍둥이 자매 이재영과 이다영은 각각 흥국생명과 현대건설의 유니폼을 입었고 전 현대캐피탈 하종화 감독의 딸인 하혜진은 전체 3순위으로 도로공사의 선택을 받았다. 센터 김예지는 2라운드 4번, 전체 10순위로 도로공사에 입단했다. 지금도 4명의 선수들은 김 감독에게 연락을 한다. 특히 이다영이 연락을 자주 한다.

그는 "다영이가 메신저를 통해 '선생님 보고 싶어요', '힘들지만 선생님께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할게요'라고 연락을 해주는데 참 기특하다. 재영이는 언니라 그런지 힘들어도 내색을 안 한다"고 전했다.

또, 김 감독은 "졸업한 제자들이 가끔 찾아오거나 안부를 묻는 전화가 올 때 지도자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며 "체육교사와 지도자 둘 중 하나를 고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지도자는 땀을 흘린 만큼 성과가 나오니 매력있는 직업"이라고도 했다.

올해 선명여고의 목표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전관왕과 선수들의 밝은 미래 그리기다.

학교 팀은 나갈 수 있는 대회가 3개로 한정되기 때문에 올해도 3관왕이 목표다.

"전국체전을 아무래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죠. 학교의 이름과 더불어 지역의 명예까지 드높일 수 있으니까요. 올해도 전국체전을 포함해 출전하는 3개 대회에서 진주 배구의 매서운 맛을 보여주렵니다. 한 번 지켜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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