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사랑 청소년 역사문화 탐방] (4) 이웃 고장 둘러보기

2014년 11월 24일~12월 18일 진행된 나라사랑 청소년 역사문화탐방 열일곱 차례 가운데 자기가 나고 자란 시·군 말고 이웃 고장을 둘러본 경우는 다섯 차례였다. 자기 고장을 둘러보는 경우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으면서도 나름 가치로운 장소를 주로 찾았다면, 이웃 고을을 둘러볼 때는 해당 고장의 특징이 제대로 나타나는 장소를 주로 찾았다.

12월 1일 창녕 남지고 학생들은 창원을 찾아 창원향토자료전시관~동판저수지~웅천읍성~창동·오동동 근대역사유적을 탐방했고, 4일 산청 덕산고 학생들은 함양에서 첫눈과 더불어 벽송사~용유담~남계·청계서원~허삼둘가옥~운곡리은행나무~거연정·동호정을 누볐다. 9일에는 의령여고 학생들과 함께 하동에 가서 쌍계사~범왕리푸조나무~세이암~최참판댁에서 노닐었으며, 17일과 18일에는 창원 태봉고와 사천 경남자영고 학생들이 통영을 찾아 서포루~통제영~삼덕항 일대~당포성지~박경리기념관을 탐방했다.

◇주남저수지·웅천읍성·창동 '삼색 매력' - 통합 이전 창원·마산·진해

옛 창원은 공업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농업도시라 해도 틀리지는 않는다. 옛 창원(의창·성산구) 농업 인구는 제각각 3만6236명과 1만8484명으로 모두 5만4720명이다. 어지간한 군 단위와 맞먹는 규모다. 이런 까닭 가운데 하나는 주남저수지에 있다. 주남저수지는 주남·동판·산남저수지 셋으로 이뤄져 있다. 먼 옛날에는 바다였고 가까운 옛날에는 저습지였다. 사람들은 활용을 위해 땅과 물을 나눴다.

창원향토자료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는 학생들.

주남은 유명하고 다른 둘은 그렇지 않다. 산남과 동판은 조용하고 외따로 떨어져 있어 새들이 쉼터로 활용하는데, 동판은 그윽하고 깊은 맛이 있어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이들은 동판 둑길을 걸으며 겨울 분위기를 제대로 누렸다. 새들은 둑에서 떨어진 나무 뒤쪽에 주로 모여 있었다. 주남을 찾는 겨울철새 가운데는 고니도 있다. 백조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더 알려진 고니는 주남 일대에 1000마리 가까이 날아온다. 아이들은 우아하게 고개를 꼰 채 넉넉한 품새로 헤엄치는 고니를 보면서 짧고 낮게 탄성을 내지른다.

바로 옆에는 1009년 4월에 자리 잡은 창원향토자료전시관도 있다. 문화재라면 당연히 오래된 옛것이려니 여기는 통념을 깨는 민간전시관이다. 전직 공무원인 양해광 관장이 평생을 두고 모은(버리지 못한) 음반과 교복·풍금·의자, 선거·영화 포스터와 (휴대)전화·삐삐·교과서·교복·주판 등등이 들어차 있다.

일제강점 이전 시기 진해의 중심은 지금 웅천동 일대였다. 대마도 정벌로 왜구를 소탕한 세종 임금은 1439년 웅천읍성을 쌓았다. 웅천 남쪽 야트막한 고개에는 제포진성터가 있다. 고려시대 수군만호영이 있었고 조선 초기까지 경상우수영이 있었던 자리다. 왜구들이 고개를 넘어 오지 못하게 막는 시설이었다. 하지만 1510년 삼포왜란과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적은 제포진성을 넘어 웅천읍성까지 함락했다. 아이들은 이런 얘기를 들으며 성곽 위에 올라 시원한 눈맛을 누린 다음 근대 역사·문화 유적이 곳곳에 있는 마산 창동·오동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선비문화와 여성 상위 문화재 - 함양

함양은 영남학파의 종조 김종직(1431~1492)이 군수를 지낸 이래 선비의 고장으로 이름을 굳혔다. 김종직은 학문을 진흥시켰고 그런 아래에 공부를 하려고 많은 선비들이 함양을 찾았다. 남계서원에서 모시는 일두 정여창(1450~1504)도 김종직의 제자다. 1552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었는데 1542년 세워진 경북 영주 소수서원 다음으로 오래됐다. 아이들은 바람이 차가운 데도 외삼문 풍영루에 올라 한 바탕 웃음을 터뜨린다. 바로 옆에는 같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1464~1498)을 모시는 청계서원이 있는데 크기는 작지만 분위기는 전혀 처지지 않는다.

앞서 찾아간 벽송사에서는 내리는 눈을 한껏 즐겼다. 1520년 창건한 벽송사는 풍경이 멋지고 터잡은 자리도 무척 푸근한데 여기에 눈까지 더해 즐거움이 커졌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양식을 본떠 조선 초기에 만들었는데 예전에는 앞에 법당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절간 망한 뒤에 새로 지으면서 석탑 아래에 터전을 닦은 때문이다. 지금 절간 한가운데에는 대웅전이나 비로자나전 같은 법당 대신 벽송선원(禪院)이 있는데, 우리나라 선불교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고들 한다.

다음에는 용유담을 잠깐 눈에 담고는 안의면 허삼둘 가옥을 찾았다. 1918년 갑부 집안 여자 허삼둘이 남편과 지은 기와집인데 안주인한테 실권이 있음을 보여주는 독특한 구조다. ㄱ자 모양 안채 꺾이는 모서리(그러니까 한가운데)에 부엌이 있는데 여기서는 안마당과 아랫것 살림은 물론 사랑채 인기척까지 바로 알아챌 수 있다.

학생들이 함양 운곡리 은행나무 둘레를 재고 있다.

허삼둘 가옥을 나와 비단내(금천 錦川)를 거슬러올라 농월정 가까운 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어서 천연기념물 운곡리 은행나무를 만나러 간다. 잎은 다 지고 없지만 대신 가지마다 쌓인 눈이 아이들을 맞았다. 하나같이 탄성을 내지르고 곳곳에서 인증샷을 찍느라 바쁘다. 우르르 달려들더니 두 팔을 뻗어 둥치 크기를 재어본다. 여덟 아름을 하고도 남음이 있는 둘레였는데, 키도 40m에 이를 정도인 데다 수컷인 덕분에 곧기까지 해서 내뿜는 기운이 그야말로 대단하다.

화림동 골짜기로 옮겨가 거연정에서 군자정을 거쳐 동호정까지 시내를 따라 내처 걸었다. 정자들은 둘레 자연풍광과 잘 어울릴 뿐 아니라 거기서 바라보이는 풍경도 멋지다. 동호정은 눈과 어우러지는 물도 좋았지만 바로 앞 너럭바위 차일암(遮日岩) 너른 품도 괜찮았다.

◇신선이 된 최치원 - 하동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최치원이 합천 해인사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적었다. 그런데도 하동은 최치원을 자기 품에서 신선으로 만들었다. 그만큼 풍광이 좋은 데가 하동이다. 범왕리 푸조나무와 그 앞 시냇가에 있는 세이암이라는 바위가 그 자취다. 최치원이 세상을 떠나 지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기 앞서 꽂은 지팡이에서는 싹이 나 푸조나무가 됐다. 또 바위(岩)에 걸터앉아 시냇물로 귀(耳)를 씻었는데(洗) 이것이 그이의 마지막 속세 행적이다.

▲ 진감선사 대공탑비 앞에서 사진을 찍는 학생들.

동네 어르신들은 최치원 도력이 상당해 손가락으로 바위를 파고 洗耳岩 석 자를 새겼다고들 한다. 대단한 학문을 갖췄음에도 뜻을 펴지 못한 최치원을 동정하고 또 최치원을 마음에 담음으로써 자기 대단찮은 처지를 심리적으로 합리화했던 백성들이었다. 그리고 신선 최치원은 지금도 살아 있다. 최치원이 생전에 대단하게 출세하고 권력과 영화를 누렸다면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었을까?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함께 떠올리면서, 박경리 선생이 대하 소설 <토지>를 통해 새롭게 낳은 최참판댁으로 향했다.

하동 최참판댁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

◇지역의 모든 것이 담긴 통제영 - 통영

통제영 찾는 첫걸음을 서포루에서 시작하는 까닭은 옛적 통제영 성곽도 볼 수 있는 데다가 남쪽 바다와 북쪽 산기슭 그리고 동쪽 동피랑 일대까지 통제영 옛 영역을 한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전체를 익힌 다음 골목을 따라 내려가 통제영으로 스며들었다.

통제영이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슨 해설을 늘어놓으면 재미가 달아나고 만다. 아이들은 역시 몸을 움직이면서 누려보고 느껴보고 찾아봐야지 보람있어한다. 이런 식이다. 통제영에는 주전소(화폐제조공장) 자취가 있다. 쇳물을 만들던 노지(爐址, 화로터)가 여럿 있는데 ①~⑧ 번호가 붙은 여덟과 아무 표지도 없는 하나가 있다. 몇 개인지 찾아보라 하면 열에 아홉은 여덟이라 하지만 간혹 한 명은 아홉이라 한다. 이렇게 몸으로 한 번 새긴 기억은 오래 가기 마련이다.

한때를 즐겁게 보람차게 노닌 다음 삼덕항으로 옮겨갔다. 통영 바다에 새겨져 있는 고된 노동의 증표인 돌벅수, 일본을 향해 가던 네덜란드 사람 멘데스가 임진왜란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1604년 여기 표착했음을 알리는 기념비, 고려 최영 장군과 조선 이순신 장군의 승전지 당포성을 제대로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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