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렇게 결혼했어요] 손견익·박분선 부부

내(박분선·52) 나이 24살인 1987년 가을에 중매가 들어왔다. 윗집에 사시는 아주머니가 어느 날 저녁 우리 집에 와서는 한 남자(손견익·52)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셨다. 그 아주머니 말을 빌리자면 키 178cm에 인물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다고 하셨다. 물론 약간의 거짓말 섞인 포장도 있었다. 나는 관심을 보이며 '직장도 든든하고 군인이니 몸도 마음도 건강하겠다'는 혼자 생각을 했다. 여기에 검소하기까지 하다고 했다. 이 정도면 결혼상대로 훌륭했다. 다 좋은데 한 가지, 나이가 나랑 동갑인 24살이라고 했다. 나는 '소똥도 안 벗겨진 사람이 무엇이 그리 바빠 벌써 장가를 가려고 하느냐'고 핀잔을 주며 아주머니에게 "됐습니다"라고 했다.

한 해 지나, 또다시 그 남자로부터 선 자리 제의가 들어왔다. 말하자면 한 살 더 먹은 후, 남자가 휴가 나온 김에 한번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번에는 약속장소인 경주역 앞 다방으로 나갔다.

건강해 보이는 군복 입은 남자와 그의 형수가 함께 앉아있었다. 나를 보고는 남자와 그의 형수가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남자가 형수와 미리 약속하기를, 여자가 마음에 들면 오른쪽으로 팔을 의자에 걸치기로 했다고 한다. 남자는 나와 인사를 나눈 후 마음에 든다는 신호로 팔을 옮기며 형수와 함께 웃은 것이다.

나 역시 남자 첫인상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생각과 달리 나이에 비해 몸가짐이 점잖고 듬직해 보였다.

남자 형수가 떠나고 둘만 남았다. 남자는 중매 아주머니께 나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한 것은 내가 심하게 말한 것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여자이기에 그런 말을 하나 싶어 오기도 났다는 것이었다.

선을 볼 때 식사시간이면 남자가 대개 음식을 권하는데, 이 남자는 음료 한 잔을 두고 세 시간가량 이야기만 했다. 배고픈 시간이었지만 이 남자는 온통 자기 자랑만 했다. 그래도 이야기를 들어보니 술은 맥주 한두 잔, 담배는 하루에 한두 개비 피울까 말까라고 했다. 뭐든지 과하지 않은 이 남자의 모든 이야기가 진실해 보였다. '아, 생활력 하나는 강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이 남자가 마음에 충분히 든 것은 아니었기에, 기약 없이 헤어졌다. 그 다음 날 아침에 남자 어머니께서 우리 집으로 전화하셨고, 우리 엄마와 대화를 했다. 알고 보니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라 마음이 통하셨는지, 남자 어머니는 다음날 엄마와 나를 집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한테 이끌려 남자 집으로 갔다. 두 분 어머니는 얼굴을 알아본 듯 여러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결혼시키자고 했다. 우리 엄마는 자식 혼사 주도권을 꽉 잡고 계신 분이라 자식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카리스마 있는 분이었다.

일주일 후 남자는 다시 휴가를 나왔다며 전화를 했다. 머나먼 강원도 철원에서 내가 있는 경주까지 온 것이다. 오늘 온 이유는 약혼식을 하기 위해서란다.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인지…. 헛웃음만 나왔다. 남자 쪽에서는 어머니, 큰형 내외, 부산에 사는 둘째 형 내외가 오셨다고 한다. 우리도 급하게 오빠들을 불러 경주 시내 중국 요리점에서 얼렁뚱땅 약혼식이라는 걸 해 버렸다.

결혼날짜까지 잡혔다. 남자는 휴가 복귀를 했기에 나 혼자 청첩장 및 예식장을 알아보는 등 준비를 했다. 그래도 기특하게도 나는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남자는 하루에 서너 번씩 집으로 전화했고, 나는 전화비 많이 나온다며 한 번만 하라고 했다. 남자는 괜찮다며 미지근했던 내 마음을 적극적으로 붙잡았다.

결혼식이 다가와 엄마, 작은오빠와 함께 준비한 혼수를 싣고 남자 근무지인 철원으로 갔다. 숙소로 들어가니 방바닥은 싸늘하게 식어있어 발이 시렸다. 난로 위에 담긴 물통을 들여다보니 구정물이었다. 방 한쪽 휴지통을 열어보니 악취가 심하게 났다. 화장실이 멀어 밤이면 여기서 소변을 본 모양이었다.

사는 모습을 보고서야 '얼마나 외로운 생활이었으면 그렇게 빨리 결혼하고 싶어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나는 가까운 여관에서 자기로 했는데, 남자 혼자 추운 방에 두고 가려니 마음이 짠했다.

다음날 고무통에 둔 빨랫감이 꽁꽁 얼어있는 모습도 봤다. 이에 엄마는 "어린 나이에 사는 모습이 참 딱하다"며 안쓰러워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 내가 남자 얼굴을 다섯 번째 보던 1988년 8월 8일 결혼식을 올렸다. 예식장에서 남자는 군 정복을 입고 당당히 입장했지만, 신부인 나보다 더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결혼식·피로연을 마친 후 신혼여행을 가야 하는데 남편은 차도 준비하지 않았다. 겨우 차를 빌렸는데, 경주로 향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경주로 신혼여행을 간 것이다.

이제 올해 8월이면 결혼 27주년을 맞이한다. 슬하에 장성한 아들 둘이 있다.

연애 기간이 없어 결혼 후 서로 알아가는 단계에서 때로는 실망도 하고 다툼도 있었지만, 좋은 점이 하나하나 찾아오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이제 의지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서로의 가슴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박분선(창원시 도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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