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오백리](18) 진주시 진수대교∼진주교

"1936년 병자년 대홍수가 남강 물길을 다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상류에서 중류까지 내려오면서 유로가 많이 바뀌었지요. 물이 범람하니 제방을 높이 쌓거나 유역을 정비하면서 물길을 인위적으로 틀어 돌리기도 하고…."

진주 문화와 역사를 공부해온 심인경(42·진주시 가좌동) 씨는 덕천강과 남강 일대를 같이 다니면서 그동안 남강은 본래의 모습에서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고 말했다. 자연 그대로의 남강 물길은 어느 쪽으로 어떻게 흘러갔을까 잠시 떠올려보지만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지리산에서 흘러온 덕천강 물길은 진수대교에 닿았다. 진수대교는 진주시 대평면과 내동면을 잇는 다리이다. 내동면 내평마을은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곳이다.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명륜 등 양반들이 농민들과 함께 아전들의 비리와 세금 포탈 등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두고 처음으로 자리를 같이한 곳이다. 즉 '진주농민항쟁 최초 모의지'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진양호가 들어서면서 물속에 잠겼다. 진양호 일주도로에 서서 눈으로 가늠을 하다보니 건너 까꼬실(귀곡섬)이 바라보이는 지점이다. 지난 회에서 이미 얘기했지만 진주농민항쟁 첫 도회를 열었던 진주시 수곡면 창촌리 수곡장터도 덕천강이 되었다.

473360_361500_1646.jpg

'너우니'와 '굴바위'를 찾아서

남강 물길은 덕천강과 경호강 물길을 합해 진양호를 이루었다. 진양호 일대는 '너우니'였다. 1969년 서부 경남의 거대한 물그릇인 인공호수 진양호라는 이름을 얻기 전까지 진주 사람들에게는 '너우니'였다. 명석면 신풍리와 판문동 일대 넓은 들이었다는 너우니는 그래서 그런지 진양호 물속에 잠기고 난 뒤에도 사람들은 "진양호 가자"보다는 "너우니 가자"는 말을 썼다. 이 말은 너우니에 가면 호수가 있고 공원이 있으니 나들이 가자는 뜻으로 쓰였다.

그런데 '너우니'가 무슨 뜻인지를 두고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렸더니 엇비슷하지만 여러 의견들이 쏟아졌다.

진주시 명석면이 고향인 서성룡(43·하대동) 씨는 "우리 동네에선 물에 잠긴 신풍 마을을 너우니, 널문리라고 불렀다"며 "지형이 넓은 문(너른문)을 닮았다 하여 널문으로 불리다가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게 판문이라네요"라고 말한다.

01.jpg
진주성과 남강. 타 지역민들은 도심 한가운데 큰 강과 성이 있는 것만으로 축복받은 일이라고 말한다. (2011년) ./사진 홍상환

현재 판문동에 살고 있는 김종찬(49) 씨 의견은 좀 달랐다. 김 씨는 "너우니는 넓은 강을 건너는 나루터의 순 우리말"이라며 "나룻배 타고 건너야 하동·순천·곤양을 갈 수 있었다. 양반들이 이 나루터를 광탄진이라 칭했다"고 말한다. 김 씨는 '너우니'는 '넓은강 나루터'라고 단정 짓는다.

진주향토문화대사전에 따르면 옛날 진주로 통하는 관문의 자리에 위치한 지역이라 하여 '널문이'라고 일컬어왔으며, 지형이 널따란 널문(板門) 모양을 이루고 있다 하여 '판문동'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박용식(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너우니'를 '널문+이'라고 설명한 데가 있는데 '너우니' '넓은+이'로 보아야 한다"며 또 "한자로는 '넓을 광' '여울 탄'을 써서 '광탄(廣灘)'이라 적었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판문'이 있기 때문에 '널문'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널문의 실체가 뭔지도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판(板)'은 '넓다'를 한자로 적을 때 많이 사용되었던 글자"라며 "현재 물속에 잠겼지만 너우니는 진주 역사에서 중요한 곳"이라고 강조한다.

너우니와 함께 옛 지명이 되면서 남강가 그 위치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것이 '굴바위'이다. 굴바위는 1970년대 진주 시내권 학교의 단골 소풍 장소였다. "나루터가 있었지요. 상류 쪽이다보니 모래보다는 자갈, 바위 천지였어요. 거기서 소풍 때 강 건너 약수암을 갈라치면 줄을 잡아당겨 배를 타고 갔던 기억이 있어요."

03.jpg
남강 습지원. 자갈 바위 천지였던 남강변 유역은 시민들이 즐겨찾는 명소가 되었다.

"지금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근처 어디쯤에 큰 굴이 하나 있었어요. 그래서 굴바위였던가 싶네요."

여러 이야기에 따르면 굴바위는 지금의 남강 습지원에서 판문천 입구 사이에 있었던 듯하다. 분명한 것은 굴바위에는 나루터가 있었다. 내동면이나 사천 쪽에서 넘어오는 교통수단이었다. 이상현(50·진주시 판문동) 씨는 "10살무렵 아버지한테 들은 건데 김장철이면 사천에 사는 동네 청년들이 쌀·보리 등을 가지고 판문동에 와서 김장무로 바꿔 지게에 한가득 지고 굴바위 나루터에서 남강을 건너가곤 했다더라"고 기억한다. 남강댐이 생긴 이후에도 줄배는 이용되다가 1970년대 후반 무렵 사라졌다.

1970년 후반 남강 변 굴바위. 학생들은 물론 주민들의 소풍 장소였다. 강쪽으로 나루터가 있었다. 기자의 집안에 남아 있던 옛 사진이다.

남강과 기개 높은 진주 여성들

너우니와 남강댐, 굴바위를 지나온 남강 물길은 진주성과 촉석루 아래를 지난다. 이 구간의 진주 남강을 톺아보는 것은 결국 이곳에서 의롭게 살아왔던 진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진주 남강에는 유독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이 얽혀있는 듯하다. 논개가 있고, 산홍이 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진주 기생들이 있다.

논개 이야기는 역사인지 소설인지 그 경계를 넘나들며 많은 사람들을 애끓게 했다. 논개는 남강과 일체가 되었고, 지조와 충절의 대명사가 되었다.

논개의 뒤를 잇는 것은 구한말 기생 산홍(山紅)이다. 진주성 촉석루 한쪽에는 논개의 공덕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가 있다. 이곳에 가면 산홍이 의기 논개의 충절과 자신의 처지를 읊은 시 한 수가 걸려 있다.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이란 제목의 시는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 있네'라고 읊고 있다.

그렇다면 산홍은 어떤 기생인가.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906년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인 이지용(李址鎔)이 진주에 왔다가 산홍에게 첩이 될 것을 명했다. 그런데 오히려 산홍은 그를 호되게 꾸짖으며 "내가 비록 천한 기생이오나 사람이온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며 거절한다. 그 뒤 산홍이 겪은 고초야 두말할 나위 없었으리라.

1940년 진주 출신 음악가 이재호는 '세세년년'이란 대중가요에서 진주 기생 산홍을 안타까이 찾는다. '아 너만 가고 나는 혼자 버리기냐. 너 없는 내 가슴은 눈 오는 벌판이다. 달 없는 사막이다. 불 꺼진 항구다.' 일제강점기 당시 나온 이 노래는 마산 출신 가수 반야월이 불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주성 절벽에는 지금도 '山紅'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세월 지나 누군가가 산홍의 절개와 충절을 기리기 위해 새겼던가 싶다.

다음으로는 리영희 선생이 그의 저서 <대화>에서 언급한 것으로 젊은 날 진주에서 겪은 짧은 일화 속에 나오는 이름을 알 길 없는 진주 기생이다. 1950년대 초반 지리산 토벌 당시 진주 시내 술집에서 만났다 한다. 자신을 거절하고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기생을 찾아 남강가에 있다는 기생의 집을 수소문해서 찾아갔다고 한다. 젊은 장교 리영희가 술기운에 총을 빼들었지만 그이는 "진주 기생은 강요당해 아무데나 따라가지 않습니다"라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리영희 선생은 그후 평생동안 지위와 총에 굴복하지 않았던 진주 기생에게서 인간의 고귀함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수많은 진주 기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도 논개의 넋을 기리며 의암별제를 지냈다. 당시 진주 기생들은 의암별제에 전국의 많은 문화예술인을 불러들였고 자신들의 예기를 펼쳤다. 그 장엄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뒷이야기들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혹자는 이런 분위기가 1949년 지방예술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 창립 기반이 되었다고 말한다. 의암별제는 1960년대까지 진주권번에서 지냈으나 진주권번이 없어진 후 진주여성단체협의회에서 지내왔다.

지금도 촉석루 아래 의암에 서서 마주보이는 바위를 훑어보면 '일대장강 천추의열-帶長江千秋義烈)'이라고 새겨진 것을 찾을 수 있다. 한 줄기 긴 강물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 년 세월을 흐른다는 뜻이다. 진주 사람들은 남강과 진주성, 촉석루에 어린 의로운 기운과 열정이 자신들에게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진주성과 남강, 그리고 황포돛배.(2010년) /홍상환

남강이 키운 근대 진주 인물들

형평운동가 백촌(栢村) 강상호(姜相鎬, 1887~1957) 선생은 현재 진주성 앞 남강을 따라 줄지은 장어거리 쯤이 집이었다. 소년운동가 강영호(姜英鎬, 1896~1950) 선생의 집이기도 하다.

이들 형제는 진주의 부호였던 강재순의 아들들이다. 아버지 강재순은 3·1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따로 활자화해서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강상호 선생은 맏이로 일제시대 백정들의 신분 해방운동이었던 형평운동을 이끌었다. 강영호 선생은 아동문학가이자 진주 소년운동을 주도했다. 이 형제들은 모두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차별받는 이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이들이 유년기를 보내고 뜻을 키우던 근처에는 현재 형평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남강을 가운데 두고 건너편에는 독특한 화풍으로 세계를 사로잡은 내고 박생광(1904~1985)이 살았다. 망경동(현 천전동) 대숲은 박생광이 매일 남강과 진주성, 촉석루를 보며 뛰어놀던 유년기의 주요 장소이다. 박생광의 집은 진주성이 있는 시내 쪽에서 보자면 '배건네'였다.

02.jpg
남강댐은 1962년에 시작해 1969년 완공됐다. 지금의 댐은 2001년 보강을 한 모습이다. ./사진 홍상환

이상현(50·진주시 판문동) 씨는 1925년 도청이 이전하고 나서 대신에 진주여고 설립 허가를 내주고 2년 뒤인 1927년 진주교가 건설됐다고 말한다.

"진주교는 경남 최초의 다리라고 하데예. 그전에는 배건네, 배건너라고 했지요. 강을 건넌다는 것은 심리적으로는 이미 남의 동네로 간다는 것이지예. 시내 사람들이 배건너, 배건네라고 말하는 것에는 시내가 아니다, 시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슬쩍 낮춰 말하는 겁니더."

현재의 진주교는 1983년 완공한 것으로 1927년 최초 건설 당시보다는 남강 하류 쪽으로 조금 더 내려갔다. '진주교'라는 이름보다 '남강다리'로 더 많이 불리어왔다. 진양교, 천수교 등 다른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유일한 다리인지라 무조건 '남강다리'라 하면 다 통했던 것이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