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렇게 결혼했어요]황삼수·강옥자 부부

황삼수(73) 서마산교회 원로목사는 지난주 아내 강옥자(72) 씨 생일 때 안마기를 선물했다. 더듬어 보니 함께한 지 45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났다. 처음 만났을 때 기억이 가마득하면서도, 또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황 목사가 자신의 결혼 이야기를 직접 글에 담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성결을 강조하는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이성 교제나 연애를 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으로 인식했다. 당시 6·25전쟁 직후라 미군들이 주둔하다 보니 소위 '양공주'들이 많았다. 입술에 빨간 루즈를 바르고, 긴 머리를 싹둑 잘라내고 볶아서 파마를 하고, 옷도 한복이 아닌 양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껌을 꾹꾹 씹고 다녔다. 그래서 가족들은 이를 부끄럽게 여겼고, 주위 사람도 그들을 백안시했다.

나는 이러한 시절을 거쳐 자랐기 때문에 이성을 쳐다보는 것조차도 부담되었다. 여성들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얼굴은 발갛게 홍조를 띠었고, 속히 그곳을 빠져 도망쳤다.

그러니 교회 청년들이 연애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신학대학 1년을 마치고 대전에서 군 복무를 했다. 파견부대로 군인교회가 없어 일반교회에 출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전 시내 선배 목사님이 개척하시는 교회에서 교사와 찬양대 오르간 반주자로 봉사하게 되었다. 그때 생전 처음으로 한 여고 3학년생이 나를 많이 따랐다. 오르간을 가르쳐 달라 하기도 했고, 그 어머니도 관심을 두고 밥을 사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학생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지도 못했고, 손을 잡아 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내 마음은 닫혀 있었다. 마음은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결혼을 전제하지 않는 교제는 죄라는 의식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대하고 복학한 후에도 그러한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26살 때 한 조그마한 농촌교회 조사로 시무하게 되었다. 3학년 1학기를 마치자 부모님은 결혼해야 한다고 서둘기 시작하였다. 부모님의 계속된 성화로 연말에 선배 전도사 주선으로 진주 반성교회 장로님의 4남 5녀 중의 막내딸과 처음으로 맞선을 보게 되었다.

한창 이성이 그리운 나이였다. 치마만 둘러도 마음이 두근거리고 좋아 보인다는 시절인지라 만족해 보였다. 작고하신 그의 아버지는 교회를 헌신적으로 잘 섬겼던 명망 높은 장로였으며, 어머니는 체격도 좋으시고 후덕해 보였다. 7남매 사이에서 자랐으니 모나지 않게 잘 자랐을 것으로 확신했다. 여성과 단둘이서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전깃불 아래서 간간이 훔쳐봤기에 확실히는 몰라도 자존감이 뚜렷해 보여 호감이 갔다. 특히 당시에는 제일 인기 없는 전도사와 결혼하겠다는 것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선을 보고 난 후 소개한 선배께서 "여자 쪽에서는 만족해하니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며 나의 의사를 물어 왔다. 나 역시 부모님과 상의한 후라 솔직히 좋다고 하여 결혼이 성사되었다. 학기말 시험과 크리스마스 준비 등으로 한두 번 편지를 나누다가 부산에서 전격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잠시 차를 마시면서 "앞으로 목사 아내가 되면 삶은 힘들고 고달플 텐데 왜 힘든 이 길을 선택했느냐?"고 물어봤다. 여자는 "가장 보람있는 일을 위해서 당하는 모든 어려움은 참된 가치와 보람이 있지 않으냐"라고 했다. 그 말에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배필임을 확인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극장에 간 후 식사한 것이 데이트 전부였다. 교회 모든 행사를 다 마치고 1969년 12월 27일에 결혼하였다.

맞선 한번 보고 급히 결혼한 것이 너무 무미건조해 보이지만 결혼 이후부터 진정한 연애가 시작되고 사랑이 깊어가게 되었다. 월요일에 학교에 가면 금요일 오후에 돌아왔다. 구역 모임, 새벽 설교, 주일 설교준비, 심방, 리포트 작성…. 실로 빈틈없는 시간 속에서도 항상 신혼의 달콤함으로 채워졌다. 결혼한 지 2년 후에 우리 둘의 좋은 점만 속 빼닮은 듯한 귀엽고 예쁜 딸이 태어났다. 하나 둘 자녀가 태어날 때마다 우리 부부는 뗄 수 없는 찹쌀 궁합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아내는 나의 목회에 참 좋은 내조자가 되어 주었다. 4남매를 잘 길러내고, 한 교회에서 36년간 장기 목회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아내의 내조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황삼수(서마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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