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오백리] (17) 산청군 삼장면 유평골~사천시 곤명면

다시 지리산 동남쪽으로 톺아간다. 벌써부터 '아이고, 인자 되다'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다. 남강댐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 진양호 서쪽 옆구리에 와서 숨을 돌리는 덕천강(德川江) 물길을 먼저 이야기하려고 한다. 혹자는 남덕유산에서부터 내려온 남강 본류인 경호강 물길보다 지리산 남쪽으로 내려온 덕천강 물이 맑고 깨끗해 남강 수질이 유지되는 거라고도 말한다.

덕천강은 한 마디로 지리산 동남쪽 골짝 물이 다 모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시천천과 삼장면 유평골에서 흘러나온 덕천천 두 물줄기가 시천면 소재지 양단수에서 합수해 진주시 진양호 방면으로 굽이굽이 흘러온 것이다.

물길은 행정상으로는 산청군에서 시작돼 하동군, 진주시, 사천시를 차례로 지난다. 이번 구간은 산청군 삼장면 유평계곡에서부터 다시 진양호까지 더듬어 내려오는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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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사와 가랑잎 초등학교

덕천강은 지리산 달뜨기능선 아래 조개골에서 유평계곡으로 이어지는 물길에서 시작된다. 유평계곡은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세상에 없는 골짜기'라고 했다. 그만큼 드나들기 힘든 오지였다는 말이다. 사람들에게는 유평계곡보다는 대원사계곡으로 더 알려져 있다. 30리가 넘는 맑은 물길을 자랑한다.

대원사. 유평계곡에 있는 비구니 절이다. 계곡을 향해 자리 잡은 대원사는 어디 한 곳 허투루 들어선 것이 없다. 경내 돌 하나, 나무 한 그루마저 아주 오래전부터 저절로 생겨난 듯 자연스럽다. 대웅전 문에는 겨울 햇살을 받고 매화, 난초, 국화 등이 차례로 피었다. 색이 바랜 문살과 단청은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저 평온하다. 대웅전 옆 사리전에는 보물 제1112호 다층석탑이 붉은 빛의 기상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108배나 올리시지요." 등 뒤에서 다가온 보살이 앞질러나가더니 이미 대웅전으로 들어간다.

대원사에서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올라가면 유평마을이다. 마을 초입에 있는 옛 유평초등학교는 현재 산청유평학생야영수련원으로 바뀌었다.

유평계곡 '가랑잎초등학교'. 지금은 산청유평야영수련원으로 쓰이고 있다.

아주 오래전 '가랑잎초등학교'로 더 유명했던 유평초등학교는 삼장초교 분교였다. 1946년 개교하여 23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4년 폐교됐다. 50년 동안 배출한 학생수가 233명이니 학생 수가 얼마 되지 않았음이 빤한 일이다. 폐교될 무렵에는 전교생이 3명이기도 했다.

언제인지는 정확지 않은데 산골학교인 유평초등학교를 취재하던 기자가 아이들이 매일 가랑잎을 밟고 학교에 온다는 말을 듣고 '가랑잎초등학교'라는 별칭을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폐교된 지 20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가랑잎초등학교로 회자되고 있다.

떠도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위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이니 1960년대 후반쯤인가 보다. 당시 전교생이라고는 달랑 10명도 안 되는 유평초등학교에서 한 학생이 대통령 아들인 박지만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용인즉 비가 조금만 와도 계곡물이 넘치는데 다리가 없어 학교에 가질 못한다, 나는 학교 가는 게 아주 즐거운데 비가 오면 학교에 가질 못한다고. 그러니 우리 동네에 다리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마을에 다리가 생겼다고 한다.

또 이곳 교장으로 있던 박상화 씨가 싸릿대를 베어 싸리비를 만들어 팔고 또 도토리를 주워 당시로는 큰돈인 100만 원을 모았다. 그리고 '가랑잎장학회'를 만들었다. 순전히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도시로 식모살이를 가거나 공장으로 가는 일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가랑잎초등학교에서 대원사로 이어지는 계곡에는 얼음이 꽝꽝 얼어있다. 예년 같지 않은 따뜻한 겨울 날씨에 술술 떠밀려온 나들이객들이 제법 왁자지껄하다. 얼음을 깨는 소리가 쩡쩡 울린다. 소리마저 쨍하니 맑다.

▲ 유평계곡 대원사. 1990년대까지만 해도 1년 내내 관광객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옛 추억은 실타래처럼 술술 풀리고

지리산 골짜기에 탯줄을 묻은 사람들이 고향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할 때 가만히 보면 가난한 살림 가운데 빚어진 일들이라 목소리에서도 한결 살뜰하고 깊음이 느껴진다.

성순옥(48·진주시 하대동) 씨는 이곳 산청군 시천면이 고향이다. 지금도 일주일에 이틀은 이곳 골짜기 아이들을 가르치러 오는 학습지 교사이다.

"학교 체육대회가 열리면 온 동네가 잔치였습니다. 원리교를 지나 읍내까지 가장행렬이 이어졌는데 읍내 사람들이 길 양쪽으로 다 모여 구경을 했어요."

순옥 씨가 보여주는 사진은 1981년 가을 체육대회 때 남녀합반 피켓을 들고 가는 장면이다. 원리교에서 면사무소 삼거리로 이어지는 행렬은 작은 동네에 큰 구경거리였다. 순옥 씨는 수십 년 전 일이지만 금방 눈앞에 그려지는 듯 눈빛이 빛났다.

"원리교 위에 백화사진관이 있었습니다. 사진을 강변에 널어 말리기도 했지요. 원리교가 잠수교일 때 경운기에다 마을 사람들을 태워 가다가 인명피해가 나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시천면만 넘어가면 전부 '산중사람들'이라 했다. 덕산장이 서면 산중사람들인 거림 동당 중산리 사람들이 대로 만든 것들을 잔뜩 들고 왔다. 동당 사람들은 복조리를 만들어 생업을 끌어갔는데 가을 농번기가 끝나고 숨도 돌리기 전에 대를 쳐서 겨울 내내 옹기종기 앉아 엮었다. 음력 설 대목이 되면 손발이 쉴 틈이 없었다.

"복조리 약초 등을 많이 해서 동당 거기 사람들은 다 부자였습니다. 우리는 겨우 사리 구장터 부챗살 엮어오라는 데가 있었는데 친구들끼리 만들어 갖다주고 학용품 사고 소풍갈 때 필요한 것 샀었지요. 훌치기라는 걸 잘 했어야 했어요."

이촌향도 시기지만 덕산골에 남아있는 처자들은 열심히 대를 엮어 시집 밑천을 해갔을 정도이다. 플라스틱과 고무 제품이 나오기 전에는 그렇게 해서 제법 살만했다.

원리교 동신마을 물레방앗간집이 있었다. 사람들은 밀농사 끝나고 나면 리어카에 실어서 국수를 뽑으러 갔다. 강가에 국수 대가 좌악 열을 지어 있는데 거기에다 국수를 널어 말리면 그것도 장관이었다. 아이들은 자기 집 국수를 지키며 하루 종일 거기서 놀거나 옆에서 국수 띠지를 만들며 빨리 국수 먹기만을 손꼽았다. 그렇게 만든 국수는 여름 내내 식량이 되었다.

원리교는 당시 콘크리트 다리였는데 사람들은 '공구리다리'라 불렀다. 덕산 사람들은 원리교 밑에 천막을 쳐서 영화를 봤다. 돈이 없는 사람은 천막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리 위에서 봤다. "구곡산 과수원 풀을 베어주면 돈을 줬습니다. 소풍가기 전에 아이들이 많이 몰려갔지요."

구곡산은 덕천서원 뒤에 있는 산이다. 구곡산을 사람들은 아홉산절이라 말했다.

"덕산의 봄이 거기 있었습니다. 복숭아밭이 있어 봄이 되어 골짜기 안에 복사꽃이 피면 그 밑으로 나물 캐는 아이들이 놀고 있었지요."

3월이면 덕산중학교 학생들은 새 학년이 되자마자 천평들에 보리밟기 하러 몰려갔다. 보리타작 하러도 학생들이 동원됐다. 하지만 가을 벼 벨 때는 안 나갔다. 벼는 함부로 하면 안 되니까 아이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또 일제 때 지은 목조건물을 뜯고 학교 건물을 다시 지을 때 학생들은 세숫대야 들고 와서 같이 막일을 했다. 뜯어낸 것을 날라다 한데 버리는 것을 했다. 강가의 조약돌도 주워 와서 화단 샛길을 조성했다. 산골에서는 아이들도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한몫을 해야 했다. 상수도 시설로 수도관 만들 때는 당시 굴착기를 쓸 형편이 안 되니 땅 파는 걸 주민들이 다 했다. 순옥 씨는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나가서 일했다. 집집마다 1명은 꼭 나가야 했단다.

덕천강에 대한 기억은 남다르다. 덕천강 가에는 늘 쇠꼴 먹이는 남자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놀고 있었다.

"여자들은 주로 면사무소 앞 봇도랑에 모여 밤에 목욕을 하며 놀았습니다. 봇도랑도 지금은 복개가 되었지만…. 겨울이면 마을회관에 큰 가마솥이 있어 거기서 목욕했는데 강에 가서 물 긷고 장작 들고 가서 서로 어울려 했지요." 1980년대 후반에는 덕산에도 목욕탕이 생겼다. 금강산목욕탕. 지금도 간판은 그대로 있지만 이용객은 거의 없는 듯하다. 골짜기에 시끌시끌하던 목소리들이 사라진 지금 금강산 목욕탕도 옛 시절이 됐다.

이 골짜기 이 물길이 예사롭지 않다

예전에 덕산은 시천면과 삼장면 일대를 다 아우르는 지명이었다. 현재의 덕산은 시천면 소재지를 일컫는다. 원래 덕산은 삼장면 대하리 일대에 있던 덕산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 양단수(양당)는 두 물줄기가 만나고 있다. 이 중 한 물줄기는 지리산 꼭대기 천왕샘에서 시작해 중산리를 지나오는데 옛 이름이 살천(薩川)이다. 지금 시천(矢川)이라 불리는 것도 이에 생긴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잠깐, 시천천을 따라 중산리 쪽 외공으로 잠시만 톺아가면 20번 도로변 흰 표지판에 '지리산 외공 민간인학살 현장'이라 적혀있다. 도로에서 까꼬막을 15분 정도 오르면 소정골 합장묘역이 있다.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소정골.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시천천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군인들에 의해 500여 명의 민간인학살이 이뤄졌던 현장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끌려와 학살을 당해야 했는지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아직 단 한 명의 유족도 찾지 못한 상태이다. 매년 4월이면 안타까운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인근 지역 사람들이 위령제를 지내고 있을 뿐이다.

지리산 중산리로 가는 국도 20번 도로변에 서있는 지리산 외공 민간인학살 현장 표지판.

다시 진양호로 향하는 덕천강 물길을 따라 가려면 시천면소재지 덕산 원리교로 돌아와야 한다. 덕산은 1862년 진주농민항쟁 시발지이다. 농민군이 이곳 덕산장을 습격함으로써 진주목 전역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1862년 농민항쟁 시발지인 덕산장터. 이곳은 새 장터로 옛 장터는 좀 더 아래쪽에 있다.

현 덕산시장은 지리산에서 두 갈래로 흩어져 흘러온 물길이 합수를 하는 지점에 있었다. 때마침 장날이다. 항쟁이 시작된 곳이라니 더욱 주의 깊게 들여다보게 된다.

"아인데. 여게는 새 장터이고 구 장터는 저게 우에 있는데. 우짜노? 하도 물난리가 나니 이쪽으로 옮긴 거제. 새 장터도 원래 홍수나면 거의 잠겼거든. 근데 인자 둑을 잘 쌓아가꼬…. 우리 때야 이쪽 사람들은 양잠을 많이 했제. 맨날 뽕밭에 뽕 뜯으러 가고. 동당 사람들은 맨날 대 엮어 살고…."

첫 봉기인 덕산장 습격이 2월 14일. 하지만 그보다 훨씬 앞서 2월 6일 수곡장터에서 최초 민회가 먼저 열렸다. 장터에 대중을 모아 항쟁의 방향과 철시를 논의·결정했다고 한다.

수곡장은 당시 무실장이라 했다. 산청 하동 진주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길목이다. 항쟁은 진주목 전역으로 퍼졌다가 23일 농민군이 해산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이 항쟁이 1894년 동학농민항쟁을 낳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진주시 수곡면 창촌리 옛 수곡장터에는 현재 진주농민항쟁기념탑이 있다. 2012년에 건립한 이 기념탑은 항쟁을 주도했던 이들의 이름이 기념비를 에워싸듯 새겨져 있다. 장터 흔적은 찾을 길 없고 현재로는 당시 민회가 열리던 분위기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다만 옛 장터 가까이 흐르는 덕천강 물길을 따라 당시 주체세력이었던 초군의 심정을 헤아려본다. 100리나 되는 거리를 급히 달려온 덕천강 물길은 사천시 곤명면 금성리 진양호 서쪽에서 숨을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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